리투아니아 빌뉴스서 집단매장지 발견… 굶주림과 추위·전염병으로 사망 추정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는 우리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다. 하지만 빌뉴스는 중세 이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정치 중심지로 동유럽의 건축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빌뉴스의 구시가지는 잦은 외세의 침략과 그로 인한 파손에도 불구하고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9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관광하다 보면 안내원이나 현지인으로부터 꼭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바로 후기 고딕 건축물의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안나성당에 대한 자부심 섞인 자랑이다. “나폴레옹이 빌뉴스에 체류했을 때 이 성당을 보고 ‘내 손바닥 위에 얹어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리투아니아 대통령궁에서는 나폴레옹이 이곳에 잠시 살았다는 설명이 더해진다.

어떻게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동유럽의 소국인 리투아니아에 살았던 걸까?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할 당시, 리투아니아를 거쳐갔기 때문이다. 무려 50만의 대군을 동원한 이 침공은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와 추위에 대한 대책이 미비했던 나폴레옹군의 참패로 끝났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2000여구 유골 전 세계인 주목

그런데 최근 빌뉴스는 190년 전에 이 도시를 거쳐갔던 나폴레옹으로 인해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가을, 빌뉴스 북구의 주택개발구역에서 우연히 집단으로 매장된 2000여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건축 인부들이 통신 케이블을 설치하기 위해 판 구덩이에서 모래로 뒤덮인 수많은 유골들이 나온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유골들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사자들로 추측했다. 유골들이 발견된 지역이 구소련 군기지 내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소련 점령시대 비밀경찰에 의해 살해된 반체제인사들일 것이라는 추측도 무성했다. 그러나 법의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 유골은 놀랍게도 190년 전 사망한 나폴레옹 군대의 것임이 밝혀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발굴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프랑스 군대 제복의 단추,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등이 쏟아져 나왔다. 집단매장지의 발굴책임자인 빌뉴스대학의 아루나스 바르쿠스 교수는 지난 9월2일 이들 유골이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군의 것이라고 발표했다.

나폴레옹군의 유골 발굴은 곧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9일 영국의 BBC방송과 미국의 디스커버리 채널 방송이 이 집단매장지를 현지 촬영하는 가운데 발굴작업이 다시 속개되었다.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 알비나스 쿤쩨비추스는 “10일 오전까지 50여구의 유골이 더 발견됐다. 앞으로도 더 많은 유골이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4만명의 군인들이 빌뉴스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역사상 프랑스 군대가 리투아니아 영토를 밟은 것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단 한 번뿐이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50만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리투아니아를 통해 러시아를 침공했다. 빌뉴스에 주재한 러시아 총독이자 러시아군 총사령관이던 미하일 쿠투조프는 나폴레옹 군대에 직접 대항하지 않고 초토전술을 펼치면서 퇴각했다. 보로디노에서 격렬한 전투를 펼친 나폴레옹 군대는 9월 중순 텅 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날 화재가 발생해 모스크바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오랜 원정으로 인한 피곤과 굶주림, 그리고 점점 매서워지는 겨울 한파로 인해 나폴레옹 군대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기대했던 러시아 황제와의 평화협상이 결렬되자 나폴레옹은 퇴각을 명했다. 러시아 남쪽 퇴로는 이미 쿠투조프의 군대에 의해 막혔기 때문에 이들은 다시 리투아니아를 통하는 먼 길로 돌아 귀환해야 했다. 

모스크바 원정 6개월 만에 50만명 중 겨우 5만명이 살아남아 빌뉴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들은 극도의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부는 의과대학에 난입해 사람의 장기를 약탈해 먹을 정도로 굶주림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영하 30℃가 넘는 혹독한 추위가 계속됐다. 패잔병들은 끝내 죽음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유럽전쟁사 비밀 밝혀줄 계기

수많은 나폴레옹군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빌뉴스에서 죽음을 맞았다. 뒤쫓아온 러시아군이 시체를 치우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땅이 얼어붙어 무덤을 팔 수조차 없어 시체를 불태우려고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연기와 악취를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프랑스 군대가 파놓았던 참호 속으로 시체들을 던져 넣었다. 나폴레옹 군대로서는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유럽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집단매장지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리비에 푸파르 리투아니아 주재 프랑스 부대사는 “규모와 중요성에서 단연 사상 최고의 발견이다. 갑자기 역사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났다”고 말했다. 한편, 빌뉴스의대의 리만타스 얀카우스카스 교수(인류학·해부학)는 “발견된 유골은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즉 기아와 추위, 전염병 등으로 인해 사망한 자의 것이다. 유골은 15~25세 사이의 남자의 것으로 전투로 인한 외상의 흔적은 없다. 웅크리고 있는 자세로 보아 추위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은 패전의 원인을 날씨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는 나폴레옹의 치밀하지 못한 계획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빌뉴스 집단매장지 발견은 나폴레옹의 주장에 한층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또 코사크인과 러시아인들이 패잔병을 살해하거나 고문했다는 일부의 주장도 그 설득력이 약해지고 있다. 이처럼 이번 발견은 유럽전쟁사에 남아 있는 비극적인 대사건에 얽힌 여러 비밀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나폴레옹군의 유골은 프랑스로 귀환되지 않고 오는 10월 빌뉴스 묘지에 매장될 예정이다. 비록 군인들이 프랑스 군대 제복을 입고 죽었지만, 이들의 국적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대는 프랑스인, 독일인, 폴란드인, 오스트리아인, 크로아티아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 등 유럽 각국의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건설 현장 불도저에 의해 우연히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나폴레옹 군대의 집단매장지는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앞둔 리투아니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인근 지역에 또 다른 집단매장지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추가 발굴과 조사에 대한 유럽연합의 지원이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200년 전의 유럽은 나폴레옹의 무력에 의해 하나가 되었으나 그 결과는 허망했다. 역사는 유럽연합이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고 각국의 상호이익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하나의 유럽’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무언의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 chtaesok@hanmail.net

* 이 기사는 주간동아 제353호 2002년 9월 26일에 게재되었습니다.
출처: 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_donga/news353/wd353ff0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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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1907년부터 공동통화 제조 유통 … 회비 내고 잡지 구입 등에 사용 

그동안 유럽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은 가는 나라마다 새로운 화폐로 환전해야 했다.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각국 동전이 처치 곤란한 짐이 되는가 하면, 베테랑 여행자들은 환율이 좋은 환전소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1월부터 유럽연합(EU) 12개국이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유럽 국가들은 경제공동체와 아울러 단일통화 도입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단일통화 도입이 확정됐고, 1995년에는 단일통화 이름이 ‘유로’로 결정됐다. 유로가 정식 화폐로 도입된 것은 1999년의 일이다. 마침내 2002년부터 자국화폐 대신 유로가 일상생활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유럽인들은 이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단일통화를 추구해 왔다. 바로 만국공통어 사용을 주장하는 에스페란토 지지자들이다. 

프롬유로는 단일통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촉진하기 위해 유럽투자은행과 유럽위원회 등이 1990년 설립한 비영리기구다. 이 기구가 펴낸 ‘유럽을 위한 유로’라는 책자에는 1934년 9월13일자 소인이 찍힌 우편엽서가 실려 있다. 루마니아에서 발행된 엽서의 발신지는 스페인, 수신자는 프랑스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 사용자)다. 에스페란토로 쓰인 이 엽서는 유럽인들에게 호소하는 열 가지 사항을 담고 있다. 유럽연합을 믿어라, 유럽 단일경제구역 창설을 지지하라, 유럽 의회를 대표하는 공동의회 창설을 홍보하라 등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열 가지 내용 중 네 번째 사항은 ‘공동 유럽군대 창설과 유럽 단일통화 도입을 요구하라’다.

초기부터 단일통화에 큰 관심

에스페란토는 세계평화 실현을 목표로 폴란드인인 자멘호프가 창안해 1887년 발표한 언어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초기부터 만국공통어 실현과 함께 단일통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에스페란티스토들 사이에서만 통용됐으나 이미 20세기 벽두에 유럽 공동화폐를 실현했던 것이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언어학자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인 소쉬르의 제안에 따라 1907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스페스밀로’라는 공동통화를 제조해 사용했다. 독일 에스페란티스토인 차우나는 1921년부터 유럽 단일통화 연구에 몰두했다. 에스페란토 국제조직인 ‘세계연맹’은 기존 지폐에 이어 1959년부터 ‘스텔로’라는 동전을 통용시켰다. 비록 에스페란티스토 사이에서만 사용됐지만 이 화폐는 회비를 내고 잡지를 구독하거나 도서를 구입하는 등 기존 화폐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단일통화의 성공적 도입에 힘을 얻은 EU는 곧 회원국간의 언어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EU는 회원국 언어들을 최대한 존중하는 정책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EU 확대를 눈앞에 둔 요즈음 업무어수(業務語數) 축소, 또는 하나의 공용어에 대한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립적이고 배우기 쉬운 에스페란토를 제안하기도 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EU 의회 의원의 15% 정도가 EU 내의 원활한 의사소통에 에스페란토가 일정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의 화폐’를 위해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났듯, ‘하나의 언어’를 위한 이들의 노력 또한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될 전망이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2월 7일(321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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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1주년 롤란다스 팍사스 탄핵·사임 압력 … 마피아와 연루·이권개입 등 혐의 짙어 

최대석 /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지난해 2월26일 열린 팍사스 대통령의 취임식 모습.

2월26일 리투아니아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47)이 취임 1주년을 맞이한다. 하지만 과연 그가 취임 1주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가 리투아니아와 국제사회의 주된 관심사다. 현재 리투아니아 국회가 대통령 선서 위반, 러시아 마피아와의 연루, 이권개입 혐의 등으로 그의 탄핵 여부를 심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독립한 뒤 세 번째 치른 지난해 1월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팍사스는 55%의 지지율을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탈락한 후보들이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전직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팍사스의 당선은 충격적인 이변이었다. 아담쿠스가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위해 정상외교로 동분서주할 때 팍사스는 러시아인 유리 보리소프가 운영하는 항공회사 ‘아비아 발티카’에게서 거액의 자금을 받아 헬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

국가안전부장 폭로가 사건 발단

인터넷에 보급되고 있는 ‘팍사스 반대 배너’들.

토목공학과 곡예비행을 전공한 그는 1997년 빌뉴스 시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해 99년 빌뉴스 시장과 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총리가 된 뒤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미국의 윌리엄스 인터내셔널이 국영기업 마제이큐 정유회사를 인수하는 데 반대해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2000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끈 자유연합과 현 국회의장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의 사회자유당과 연합해 다시 총리가 됐지만 정부 결정에 일일이 간섭하려는 연합정당의 태도에 불만을 느껴 곧바로 총리직을 내놓았다. 사임 후 그는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오뚝이 정치역정을 걸어왔다. 

질서와 변화를 기치로 내걸어 당선된 젊은 팍사스 대통령은 취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현재 그는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에 빠져 있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해 10월30일 자신이 리투아니아 스페인대사로 내정한 메치스 라우린쿠스 국가안전부장이 국회의장과 총리 앞으로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이 러시아 범죄조직과 연루돼 있다는 핵폭탄성 내용이 담긴 문건을 제출한 것이다. 이보다 일주일 앞서 리투아니아 언론들은 팍사스 대통령의 딸 잉가 팍사이테(20)가 범죄세계의 대부로 알려진 헨릭카스 닥타라스의 딸 지빌레 닥타라이테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이 문건을 받은 파울라우스카스 국회의장은 이 사건이 국가안보를 위협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즉각 11월3일 본회의를 소집했다. 라우린쿠스 부장은 “이 사실을 비망록으로 남겨놓을 수도 있지만 이러다간 이 나라가 국제 마피아의 손아귀에 놀아날 것이란 우려 때문에 밝히게 됐다. 나와 대통령 사이의 신뢰는 이미 없어졌다. 내가 독대하여 보고한 기밀정보가 이해 상대자에게 곧바로 누설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날 본회의에서는 연루를 입증하는 혐의자들의 도청된 전화통화가 아무런 여과 없이 생중계로 방송돼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국회는 대통령의 국가안보 위협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한 한시적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4주일간 활동을 한 특별위원회는 12월1일 “대통령의 특별지위, 책임, 국내·외 정책 역할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행위는 리투아니아 국가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는 △대선 때 팍사스의 선거전략과 홍보를 맡은 러시아 회사 알막스와 거액의 대선자금을 지원한 유리 보리소프가 여전히 대통령과 대통령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국유재산 사유화와 다른 사업의 이권에 용인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다른 국가기관의 활동을 간섭하는 등 지위를 남용했고, 대통령은 이를 묵인했다 △대통령과 보좌관이 기밀정보를 누설했다는 등의 내용으로 돼 있다. 

웹사이트에 올려진 컴퓨터 합성사진. 리투아니아 혁명을 주도하는 3인의 얼굴을 담은 것으로 왼쪽부터 보리소프, 팍사스, 스마일리테.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대선자금의 거액 기부자 보리소프(아래 왼쪽)의 전화통화 내용이 TV를 통해 아무런 여과 없이 공개됐다.(위 부터) 


또한 조사과정에서 팍사스 대통령이 유리 보리소프에게 리투아니아 국적을 부여한 데 대한 합법성 논란이 빚어졌다. 헌법재판소는 이 국적 부여가 불법임을 판결했고, 이민국은 최근 보리소프의 리투아니아 여권을 압수해 폐기처분했으며, 그의 국외 추방을 결정했다. 보리소프는 이에 반발해 그 부당성을 법원에 제소했다. 팍사스와 추종자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불신하고 국적 부여는 정당했다고 여전히 주장한다.

12월18일 국회는 86명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 탄핵소추 발의를 의결했다. 리투아니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거나 대통령 선서를 준수하지 않거나 범죄행위를 한 사실이 밝혀질 때, 국회는 재적의원의 4분의 1인 36명의 동의로 탄핵소추를 발의할 수 있고, 재적의원의 5분의 3인 85명의 동의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 현재 국회는 소추위원회를 설치해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있다.

사건이 터지자 팍사스 대통령은 연루설을 강력히 부인하며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자신은 대통령 선서와 헌법에 위반하는 행위를 결코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건 초기 유명 정치대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ARS 여론조사를 했을 때 대통령 보좌관들이 휴대전화로 600여통의 전화를 해 ‘대통령 지지’에 표를 던진 사실이 나중에 밝혀져 여론조작 의혹까지 받게 됐다. 급기야 대통령은 안보보좌관, 외교보좌관 등 최측근 보좌관 5명을 해임했다. 연루설이 나온 뒤부터 지식인, 종교지도자, 문학인, 자치단체장 등이 팍사스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을 역임한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 총리는 “국가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정치광고는 이제 그만 하자. 나 같으면 사임하겠다”며 압박하고 있다.

팍사스 지방 순회하며 무죄 설파

팍사스 대통령은 방송사 및 중앙지의 인터뷰에는 전혀 응하지 않고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대중에게 자신의 무죄를 설파하고 있다. 소추위원회에서 자신을 직접 변호하는 방법을 거부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길을 택했다. 최근 우크메르게시에서 열린 그의 연설장에서는 극우세력 추종자들까지 합세해 팍사스 대통령을 비난하는 청년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이 청년들은 돈에 매수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방 출신이 초고속으로 대통령이 되자 시기하는 무리들이 득실거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 언론매체를 통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판단해 대통령실 자체 주간지를 발행하고, 대통령 주례방송연설을 계획하고 있다.

1월13일 그동안 팍사스 대통령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91년 1월13일 소련군은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의 주요기관을 점령하기 위해 무력 공격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13명이 총에 맞거나 탱크에 깔려 죽음을 당했다. 리투아니아는 이날을 ‘독립투사일’로 명명하고 매년 국회에서 기념식을 개최해왔다. 이 행사에서 팍사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 직전 다수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을 빠져나갔고, 대통령이 연설을 마쳤을 때 관례인 기립박수는 없었으며 의석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1월13일 훈장 수여식에서 한 수여자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위선적인 대통령이 준 훈장을 받을 수 없다. 이는 리투아니아 독립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리투아니아 국내 정치상황을 이유로 최근 이탈리아 대통령과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각각 예정된 리투아니아 방문을 취소했다. 유럽의회는 비공식 외교채널을 통해 팍사스 대통령의 4월 유럽의회 본회의장 연설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보내왔다. 이처럼 팍사스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사임 거부로 유럽연합및 나토 가입을 앞두고 있는 리투아니아는 외교적으로도 점점 고립돼가고 있다.

한편 리투아니아 네티즌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러시아 마피아 연루설 인터넷 기사는 댓글이 2000개 이상 달릴 정도다. 팍사스 반대자들은 웹사이트(http://www.paksui-ne.tk/)를 구축해 팍사스를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배너, 플래시, 합성사진 등을 만들어 인터넷에 배포하고 있다. 대선자금, 측근비리, 외교노선, 언론취재 불응 등 대통령을 둘러싼 리투아니아의 현 정국상황이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아 앞으로 리투아니아 정국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궁금하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4년 2월 26일(제423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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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국 EU 가입 예정으로 소외감 커져 … 주민들, 러시아에 “독일로 복귀시켜달라” 

최대석 / 리투아니아 통신원 ds@chojus.com

칼리닌그라드 항구에서 훈련중인 러시아 함대.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10월9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동유럽과 지중해 주변 10개국의 유럽연합 가입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2004년에 유럽연합 가입이 예정되어 있는 10개국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말타, 키프러스다. 

이어 유럽연합 정상들은 10월25일 브뤼셀에서 회원 확대와 관련된 발전기금 협정에 최종 합의했다. 유럽연합 의장국인 덴마크의 안데르스 라스무센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는 성공적이었고, 역사적인 유럽연합 확대를 향한 중요한 전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유럽연합과 각국 지도자들의 합의와는 달리, 유럽연합 확대가 가입 희망국가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슬로바키아 69%, 폴란드 66%, 슬로베니아 55%, 에스토니아 54%, 리투아니아 53%, 말타 51%, 라트비아 44%, 체코 44%의 국민만이 해당국가의 유럽연합 가입을 지지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발트 3국은 유럽연합 가입으로 인해 인접한 강국인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칼리닌그라드를 둘러싼 유럽연합, 폴란드, 리투아니아 그리고 러시아 간 비자문제 같은 예민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러 본토와 600km 떨어진 특수성

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에 접해 있는 러시아연방 491개 주(州) 중 한 주로 1945년 포츠담회의에 따라 독일 영토에서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 본토에서 떨어진 고립 영토다. 북동쪽 국경은 리투아니아, 남쪽은 폴란드 서쪽은 발트해에 접해 있다. 15,100km2에 인구는 약 100만명. 가장 가까운 러시아 본토인 프스코프 시에서 600km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의 유일한 발트해 부동항(不凍港)이자, 러시아와 동유럽을 잇는 항구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인 칼리닌그라드는 두 나라가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하면 유럽연합에 떠 있는 ‘러시아의 섬’이 될 것이다. 현재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폴란드, 러시아, 리투아니아 3국 간 무비자 협정으로 세 나라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솅겐조약에 따라 유럽연합 비회원국 국민들이 회원국을 여행할 때 반드시 비자를 받도록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더라도 지금처럼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이 비자 없이 본토로 통행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반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유럽연합의 규정대로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럽연합 역시 기존의 비자체제를 고집해왔다. 한편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인근 국가들이 모두 유럽연합에 가입한다면 우리는 더욱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이 참에 차라리 독일로 복귀시켜 달라’는 주장을 펴,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팽팽한 논란으로 좀처럼 접점을 찾기 어려웠던 이 비자문제는 10월25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한 발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칼리닌그라드의 주민이 다른 러시아 지역을 왕래할 수 있는 ‘통행증’을 발급받도록 하는 임시방편에 합의한 것이다. 

칼리닌그라드 문제는 유럽연합과 러시아 간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유럽연합 회원국과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비회원국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이는 확대를 시도하고 있는 유럽연합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년 11월 28일(348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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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독재자들 동상’ 처리 발상의 전환… 조각공원 만들어 관광객 인기몰이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중심가에 위치한 루키쉬켸스 광장 중앙에는 10여년 전까지 레닌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1952년 세워진 이 거대한 동상은 1991년 리투아니아가 소련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무렵까지 난공불락의 공산주의를 상징하듯 버티고 있었다. 비단 빌뉴스뿐 아니라 구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의 동유럽 국가 도시에는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이 동상 앞에 늘 싱싱한 꽃을 바쳤고, 찬양의 시를 낭송했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는 모두 텅 비어 있다. 구 소련을 이루고 있던 연방 국가들이 제각기 독립하면서 어제의 우상들은 사악한 점령자나 동족을 핍박한 매국노로 전락했다. 이념체제를 상징하는 이들 동상과 조각상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철거되었다.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해 3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트해 3국은 소련에 의해 여느 나라 못지않은 고통을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국가를 형성한 리투아니아는 1940년과 1944년 붉은 군대에 점령되어 반세기 동안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36만명이 사망했거나 시베리아로 강제 추방되었다. 44만명은 조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떠났다. 공산체제가 무너지자 가장 먼저 옛 소련의 조각상들이 수난을 당한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 반대 

청동이나 철골 콘크리트로 된 이 거대한 조각상들은 철거 후 수년 동안 교외의 구석진 곳에 방치되었다. 일부는 부서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조각상들의 처리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급기야 1998년 리투아니아 정부는 옛 소련 시절의 대표적 조각상 42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모전에서 리투아니아 남부의 사업가 빌류마스 말리나우스카스(63)가 기발한 제안을 했다. 말리나우스카스가 소유하고 있는 6만평의 숲에 이들 조각상을 모아 전시하는 공원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 공원은 지난해 만우절에 ‘그루타스 공원-소련조각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관했다. 

그루타스 조각공원의 개관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한 장본인들의 동상을 다시 세운다는 사실에 적잖은 사람들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대해 설립자인 말리나우스카스는 “이 공원의 설립 취지를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야 하고, 세대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리나우스카스 자신의 친척들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그루타스 공원은 빌뉴스에서 남서쪽으로 120km 떨어진 그루타스라는 작은 마을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이 공원은 숲과 늪으로 되어 있어 시베리아와 유사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철로에 전시된 화물열차 한 칸이다. 이 화물칸은 소련 점령시대에 리투아니아 거주자들을 시베리아로 짐짝처럼 옮기던 화물열차의 일부다. 공원 둘레에 쳐진 높은 철조망과 군데군데 있는 경비초소는 시베리아 강제수용소 모습을 연상케 한다. 

지금 이 조각공원에는 64개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감탄과 경배를 자아내게 만든 듯한 이 거대한 조각상들은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가져온 레닌, 스탈린, 빈짜스 미쯔케비츄스-수카스(리투아니아 공산당 초대 서기장), 마리톄 멜니카이톄(유명한 여성 빨치산) 등이다. 또 ‘어머니’ 등 이념적인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조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청년 공산주의자 네 명’과 같은 조각은 ‘술 취한 청년 세 명이 만취한 한 명을 부축하고 택시를 잡는 장면’이라는 현대적 우스개로 더 유명해졌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조각상들은 모두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들이 만든 작품으로 예술성도 뛰어나다고 한다. 

공원에는 조각상뿐만 아니라 구 소련 시절에 큰 마을 어디에나 세워져 있던 ‘문화회관’이 지어져 있다. 문화회관 내부에는 소련 시절의 각종 자료들과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공원 설립에 열렬히 반대했던 저명 인사들의 조각상들도 눈길을 끈다. 이들은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증오하는 레닌 등 공산주의자들의 동상과 함께 같은 숲 속에서 ‘동거’하게 된 셈이다.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자 전직 보건부 장관으로 조각공원 설립을 맹렬하게 반대했던 워자스 갈디카스의 조각상에는 ‘구 소련의 조각상을 가장 유명하게 한 사람을 위해’라는 유머러스한 문구가 적혀 있다. 공원 내 식당에서는 소련 시절에 주로 먹던 음식을 판매한다. 물론 이 같은 과거사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과 젊은층을 위한 놀이터와 작은 동물원도 마련돼 있다.

‘오욕의 역사’ 살아 있는 교육장 

공산체제가 무너진 후 대부분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조각상을 파괴함으로써 일종의 ‘한풀이’를 했다. 지난날 당했던 가혹한 억압에 대한 복수인 셈이다. 이 그루타스 조각공원을 제외하면 공산체제 당시의 이념적 역사물을 수집해 전시한 박물관은 전무하다. 그 결과 그루타스 조각공원은 오늘날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필자가 방문한 날도 공원 입구 넓은 주차장에는 승용차와 대형 관광버스들로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1999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60% 이상의 리투아니아인들이 이 같은 공원의 필요성에 대해 찬성하는 의사를 밝혔다. 처음에는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지금은 조각공원의 역사적, 교육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교사인 리야나씨(34)는 “소련의 강압적인 점령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는 말로 조각공원의 의의를 평가한다. 또 한때 공산주의에 심취했다는 민다우가스씨(36)는 “아이들에게는 볼거리를 주고, 우리 어른들에게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나도 한때는 청소년 공산당원이었다. 공산주의는 아름다운 이념이지만, 실현하기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국 사회도 옛 조각상 철거에 대한 적지 않은 시비를 겪고 있다. 나중에 복원되었지만 2000년 서울 영등포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이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철거되었고, 친일행적을 한 적이 있는 인사들의 동상이 철거된 예도 있다. 36년간 한민족을 억압하고 통치한 조선총독부 청사도 현재는 사라졌다. 그러나 역사적인 유물을 파괴한다고 해서 그 오욕의 역사까지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투아니아는 옛 조각상을 파괴하는 대신 광장에서 숲 속으로 자리를 옮겨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후손들은 이 동상을 보며 수치스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역사 교훈의 장으로 삼을 것이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8월 22일(348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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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1946~47년 독일서 몰수한 30만3천톤 수장 … 해변서 용기 발견 ‘공포의 바다’로 돌변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chtaesok@hanmail.net

지난 6월5일 낮 12시30분쯤. 리투아니아 항구도시 클라이페다의 스밀티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한 여성이 파도에 떠밀려온 이상한 용기(容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길이 2m, 지름 30cm로 표면에 해골 그림과 함께 ‘Yp럕ite’(이페리트)이라는 글씨가 적힌 이 용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트해에 수장된 화학무기 중 하나로 밝혀졌다. 만약 호기심 많은 어린이나 악의를 품은 사람이 이를 먼저 발견했다면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심이 얕은 발트해에 위험한 화학무기를 대량으로 수장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초기부터 전문가들 사이에 간간이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화학무기가 해변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일반인들이 느끼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한때 청정해역의 대명사였던 발트해는 이제 공포의 바다로 변하고 있다. 

“실제는 더 많은 양 버려졌을 것” 

발트해에서 발견된 이페리트는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 독일이 프랑스 전선에서 처음 사용한 발포성 독가스다. 이후 영국 이라크 독일 러시아 등이 주로 생산했다. 눈과 폐를 손상시키고 화상이나 발포 증세도 나타나는 이 독가스는 5g이면 인명살상도 가능할 만큼 위험한 무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과 47년, 연합군은 독일로부터 약 30만3000톤에 달하는 화학무기를 몰수했다. 이 무기들의 처리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았다. 엄청난 환경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미국 소련은 유럽 분할을 둘러싼 정치문제에 온 정신이 쏠려 있어 환경 따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연합국은 몰수한 화학무기를 서로 분할한 후, 대서양의 깊은 바다 밑에 수장하기로 협약했다. 자료에 따르면 영국이 4만2000톤 혹은 6만5000톤, 소련이 3만5000톤을 인수하고, 나머지는 미국 몫이 되었다. 

그러나 세 나라는 대서양 대신 가까운 발트해를 선택했다. 화학무기를 실은 배를 대서양까지 몰고 나가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몰수한독일 무기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화학무기도 함께 수장했기 때문에 실제로 발트해에 버려진 양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과 미국은 화학무기를 배에 실어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가트 해협과 덴마크-노르웨이간의 스카케라크 해협에 배와 함께 가라앉혔다. 수심 200m 미만인 이 지역은 현재도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고 고기잡이가 성행하는 곳이다. 소련은 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예 3만5000톤 분량의 폭탄과 포탄을 그대로 바다 밑에 산포(散布)했다. 독물질이 든 폭탄이 터진 장소는 보른홀름섬 인근의 스웨덴 해역과 라트비아 항구도시 리예파야에서 남서쪽으로 70마일 떨어진 해역이다. 과거 소련은 수십년간 이 해역에서 고기잡이를 금지해 왔다. 

영국과 미국 국방부는 1997년 이 작전과 관련한 자료의 비밀유지 기한을 2017년까지 연장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비밀의 막(幕)을 조금 열어주었다. 그들은 수장된 화학무기의 이름과 양, 그리고 수장된 장소도 공개했다.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현재 발트해 밑바닥에는 이페리트, 루이사이트, 사린가스, 비소 등 총 14가지에 달하는 화학무기가 가라앉아 있다. 

발트해에 있는 이 화학무기 쓰레기장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소 엇갈린다. 리투아니아 환경부 소속 해양연구센터 소장인 알기르다스 스타케비추스는 ‘례투보스 지뇨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발트해는 넓은 바다이므로 이들 무기가 가라앉아 있다 해도 독물질이 많이 희석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해수 표본을 채취해 바다 오염을 측정하고 있는데 아직 오염은 허용 기준치를 넘지 않고 있다. 또 프랑스 어류학자들이 리투아니아 해변에서 잡힌 어류를 조사했지만 별다른 변화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전직 러시아 함대의 부사령관 텡기즈 보리소프는 “어부들의 저인망에 화학무기 폭탄이 걸릴 위험이 있다. 얼마 전 러시아 잠수함들이 이 인근을 조사했는데 특수 잠수함 표면에는 아교풀처럼 무엇인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그것은 부식된 포탄에서 나온 이페리트였다. 보른홀름섬 근처 약 40m 수심에서는 많은 양의 사린가스가 발견되었다”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수년 내 엄청난 재앙 초래 우려 

지난 90년대 중반부터는 발트해의 화학무기 수장 지역에 대해 몇 차례의 현장조사가 이루어졌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 사이에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인근 몇몇 국가 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조사를 벌였다. 이들은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배에서 화학물질이 새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심하게 부식된 포탄이 분해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준치를 200배나 넘는 비소량을 함유한 물과 토양 표본도 있었다. 몇몇 전문가들은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수년 내에 대대적으로 독물질이 분출되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이 예측이 현실이 될 경우, 발트해 연안 국가들은 환경 재앙뿐 아니라 경제붕괴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어업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경제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발트해의 연간 어획량은 250만톤에 달한다. 발트해의 어획금지 조치는 곧 국내 생산의 감소로 이어지고 연쇄적인 경제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는 연안 국가뿐 아니라 유럽연합, 나아가 세계 경제에 큰 파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물론 발트해 연안 국가들이 미국 영국 러시아 등 당시 연합군 국가들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는 2억5000만 유럽인에게 체르노빌 원전사고나 9·11 테러 이상의 공포와 심리적 공황상태를 야기할 것이다. 또 수심이 얕은 발트해에 수장된 거대한 양의 화학무기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55년 동안 바다 밑에서 잠자고 있다가 파도에 밀려온 이페리트 용기는 그동안 소극적으로 대처한 국가들에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관련 국가들의 원수뿐 아니라 유럽연합과 나토가 이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려는 분위기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화학무기 생산 중단, 사용금지 및 폐기 등에 대한 세계인의 요구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수장된 화학무기는 일반인들에게도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페리트 용기 발견을 보도한 리투아니아 언론사의 인터넷 독자 의견란에는 발트해 해변 대신 해외나 내륙 호수로 여름휴가를 가겠다는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화학무기를 제조한 나치 독일이나 이를 경솔하게 바다에 수장한 연합국측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글도 적지 않다. 올 여름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발트해를 찾는 피서 인파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6월 27일(340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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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 국회의장 … 여성 운전자와 접촉 사고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최근 리투아니아의 고위층 인사 세 명이 탄 승용차가 잇따라 접촉사고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가해자는 모두 일본 자동차인 마쓰다를 모는 여성 운전자였다. 

첫 사고는 지난해 12월13일에 일어났다. 이날 아침 발다스 아담쿠스 리투아니아 대통령을 태운 전용차는 경찰관과 경호원 차의 호위를 받으며 집무실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대통령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로세날로 거리에서 마주 오던 마쓰다가 중앙선을 넘어 대통령 전용차를 들이받았다. 

마쓰다를 운전한 라사 바넬리에녜(23)는 앞에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추자 급히 건너편 차선 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건너편 차선에서 선두에 달리던 경찰관 차가 막 지나가고 바로 뒤에 대통령 전용차가 오고 있었다. 이 접촉사고로 바넬리에녜는 벌금 150리타스(4만5000원)를 물었다. 

두 번째 사고는 1월8일 빌뉴스 외곽에서 일어났다. 출근하는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 리투아니아 국회의장을 태운 BMW 740 전용차가 2차선 도로에서 마주 오던 차와 경미한 접촉사고를 냈다. 쌍방의 잘못으로 판정된 이 사고로 운전자 리라 그리니톄(24)와 국회의장 승용차 운전사는 각각 벌금 100리타스(3만원)를 물었다. 

마지막으로 1월18일 빌뉴스 시내에서 라이무톄 밀비디에녜(38)가 몰고 가던 차가 아르투라스 포빌류나스 리투아니아 올림픽위원장의 BMW 525 리무진을 들이받았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마쓰다가 아직 제설작업이 안 된 거리를 저속으로 달리던 BMW를 들이받아 난 사고였다. 운전사가 사고 수습을 위해 교통경찰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포빌류나스 위원장은 300m 떨어진 집까지 눈길을 걸어가야 했다.

비록 경미한 접촉사고였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태운 전용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제왕적 권력’으로 표현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 하지만 이 사고 후 대통령 경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도, 경호 담당자가 징계를 받았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히려 사고를 낸 여성 운전자들이 대중매체의 주목을 받아 유명해졌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2월 14일(322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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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모래를 밥으로 냠냠 … ‘리투아니아 엽기녀’ 

<최대석/ 리투아니아 빌뉴스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리투아니아 북서 지방의 작은 마을에 사는 스타니슬라바 몬스트빌례네씨(54·여) 는 벌써 3년째 거의 모래만 먹으면서 살고 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바로 모래다. 

몬스트빌례네씨 자신도 이러한 비정상적인 식성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모래를 먹기 전 그녀는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허리가 아프고 혈압도 높고 잇몸에서 피가 나는가 하면,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마을 의사는 그녀에게 뇌종양 말기라는 진단을 내렸다. 

어느 날 몬스트빌례네씨는 평소처럼 젖소의 젖을 짜기 위해 숲길을 따라 목축장으로 가고 있었다. 길 옆에 있는 모래굴에 우연히 눈길이 쏠렸다. ‘어머, 정말 아름다운 모래네! 한번 주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줍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맛을 보라고 부추기는 어떤 신비한 힘을 느꼈어요.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 정도인걸요.” 

처음 먹어본 모래는 너무 맛있었다. 그 후 그녀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모래를 먹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빈혈이 생기거나 위에 상처가 날 것이라며 그녀를 말렸다. 식구들도 완강히 반대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그녀를 괴롭힌 현기증이 사라지고 혈압과 시력이 좋아졌다. 잇몸 출혈과 탄산증(呑酸症)도 사라지고 치아마저 깨끗해졌다. 의사들의 진단에 따르면 혈색소량도 증가했다고 한다. 그녀는 모래로 인해 자신의 몸이 건강해졌다고 믿고 있다. 의사들은 의아한 표정만 지었을 뿐, 모래가 그녀의 병을 고친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몬스트빌례네씨는 언젠가 정신없이 건초 작업을 하느라 그만 모래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자 다시 복부에 통증이 왔다. 이 같은 경험으로 그녀는 모래의 치료 효과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몬스트례네씨는 보통 일주일에 20kg 정도의 모래를 먹는다. 먹고 싶을 때마다 손으로 모래를 주먹밥처럼 뭉쳐 꼭꼭 씹어 먹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도토(陶土)가 섞인 모래다. 집 근처에 있는 숲 속 떡갈나무 아래 모래굴에서 일주일 분량의 ‘식량’을 채취해 온다. 그녀는 이 모래가 ‘초콜릿처럼 맛있다’고 한다. 

요즈음 몬스트례네씨는 가는 곳마다 모래를 관찰하고 맛을 본다. 지금은 주식이 모래이고 가끔 빵과 수프를 먹는 정도다. 그녀는 모래가 자신에게 건강뿐만 아니라 힘과 안정감을 준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한 이웃은 유명세를 타기 위해 그런 기행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유명세가 좋다 하더라도 모래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2 년 1월 3일(316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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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유명 연예인 커플 마리와 캉타, 리투아니아 호텔서 말다툼하다 참변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통신원/ chtaesok@hanmail.net

프랑스 여배우 마리 트랭티냥의 사고사는 리투아니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리투아니아와 프랑스 사회 모두를 큰 충격 속에 몰아넣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프랑스 유명배우 마리 트랭티냥(41)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호텔방에서 연인인 가수 베르트랑 캉타(39)와 다투다 뇌를 다쳐 사망한 사건이다. 

마리 트랭티냥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영화인 가족 출신 배우다. 아버지는 1960년대 영화인 ‘남과 여’의 남자 주인공인 전설적인 배우 장 루이 트랭티냥이고 어머니는 영화감독인 나딘 트랭티냥이다. 마리 트랭티냥은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배우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5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국내 영화팬들도 영화 ‘뽀네트’의 여주인공이던 마리를 기억할 것이다. 

숨진 마리는 영화 ‘뽀네트’의 여주인공

마리의 연인인 베르트랑 캉타는 프랑스 록그룹 ‘검은 욕망’의 보컬리스트. 16살에 가수로 데뷔한 그는 2001년에 앨범 ‘얼굴들’로 1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인기가수다. 캉타는 반(反)세계화 집회에서 공연하는 등 진보적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마리 역시 여성운동에 열심이었다. 영화에서 상처받은 여성이나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성상을 감동적으로 연기했던 마리는 지난해 영화감독인 전남편과 이혼하고 캉타와 동거해왔다. 캉타는 리투아니아 현지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음악보다 마리를 더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6월 초부터 리투아니아에서 체류해왔다. 프랑스 TV 방송사와 리투아니아 영화제작사가 합작·제작하는 프랑스 여류 소설가 가브리엘 시노니의 삶을 그린 2부작 텔레비전 영화 ‘콜레트’에서 마리가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콜레트’(시노니의 필명)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남성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뇌를 그린 영화로 마리의 어머니인 나딘 트랭티냥이 감독을 맡았다. 

사건의 전모를 특집으로 다룬 리투아니아 주간지 ‘엑스트라’.
  
7월 말까지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남은 촬영 장면은 콜레트가 결혼을 하고 남편이 그를 배신하는 마지막 장면뿐이다. 마리는 촬영 내내 어머니 나딘, 함께 출연하는 아들 로만, 그리고 연인 캉타와 함께 유서 깊은 빌뉴스의 구시가지에 있는 도미나 플라자 호텔에 묵었다. 

그런데 영화촬영 종료를 불과 3일 남긴 7월27일 아침 7시30분, 혼수상태에 빠진 마리가 빌뉴스대학 응급병원으로 이송되어 왔다. 심한 뇌출혈이었다. 의료진은 즉각 뇌수술에 들어갔다. 연인인 캉타 역시 과음과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사고는 병원에 오기 서너 시간 전에 일어났다. 사고 전날 밤,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말다툼을 하던 중에 마리가 캉타에 밀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것이다. 

27일 수술 후에도 마리는 깨어나지 못했고 프랑스에서 전문의가 급파되어 29일 두 번째 뇌수술이 이뤄졌다. 하지만 의료진은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마리의 부모는 딸이 고국인 프랑스에서 눈감을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31일 특별기편으로 프랑스에 온 마리는 결국 8월1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6일 수천명의 애도 속에서 파리 페르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한편 캉타는 현재 리투아니아에 억류되어 과실치사나 살인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리투아니아 형법에 따르면 과실치사는 최소 5년에서 최고 15년까지 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이 사건이 아주 불행한 우발적 사고이며, 자신은 마리를 폭행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는 그가 프랑스 법에 따라 조사받고 처리되길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고경위는 추후 양국 검찰의 정밀조사에 의해 밝혀지겠지만, 평소 진보적 사회활동에 앞장서 왔던 유명배우와 가수 사이에서 일어난 사고의 파장은 리투아니아와 프랑스 모두에서 쉬 가라앉지 않을 듯싶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03 년 08월 21일(398 호)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Posted by 초유스

팍사스 대통령 당선 예언 롤리쉬빌리 파문 확산 …  인사개입 소문 국가 이미지 실추

요즈음 리투아니아에서는 ‘초자연적인 치료능력’을 가진 역술인과 현직 대통령의 관계가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리투아니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지난 1월5일. 당선이 확정된 후 팍사스 대통령 당선자의 부인은 공개 인터뷰에서 “한 역술인이 남편이 이긴다고 예언해 당선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어 2월26일 TV로 생중계된 대통령 취임식에서 팍사스 대통령은 한 여인에게 여러 번 입맞춤을 했다. 그가 바로 그루지야 출신의 역술인 레나 롤리쉬빌리였다. 롤리쉬빌리는 취임 축하미사에서도 팍사스 대통령 부부 뒷자리, 퇴임하는 아담쿠스 전 대통령 부부 바로 옆에 앉았다. 시청자들은 국회의장, 국무총리보다 앞자리에 앉은 이 여인의 정체에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번 리투아니아 대통령선거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12월22일 열린 대선 결과 아담쿠스 전 대통령이 35.06%, 팍사스가 19.4%의 표를 얻었다. 그런데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서 1월5일 결선투표를 한 결과 팍사스가 55%의 표를 얻어 45%를 얻는 데 그친 아담쿠스를 누른 것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아담쿠스를 지지했고, 그의 승리를 낙관하던 상황이었다. 

46세의 팍사스 대통령은 1997년 빌뉴스 시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불과 5년 남짓한 정치경력 중에 두 번이나 빌뉴스 시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96년 롤리쉬빌리는 당시 건설회사 사장이었던 팍사스에게 이러한 미래의 정치역정을 예언해주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팍사스 부부는 롤리쉬빌리와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다. 

신비한 치료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소문난 롤리쉬빌리는 화장지를 아픈 부위에 놓고 손에서 나오는 따뜻한 기를 보내 환자를 치료한다고 한다. 그는 팍사스 외에도 현 정부의 적지 않은 고위 공직자들과도 교분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롤리쉬빌리가 고위직 임명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만연하다는 점이다. 리투아니아 최대 일간지인 ‘레투보스 리타스’에 따르면 고위직 후보자들은 임명되기 전에 롤리쉬빌리를 먼저 만나야 했다고 한다. 클레멘사스 림쉐리스 국회의원은 “고대나 중세처럼 리투아니아에는 무당과 부족이 있고, 부족장이 무당의 말을 들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무당의 말에 지도자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비꼬았다.

클라이페다 부시장을 지낸 안타나스 리그누가리스 역시 비판적이다. 그는 자신도 롤리쉬빌리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다며 “롤리쉬빌리는 저명 정치인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리투아니아 로마 가톨릭의 최고위 성직자인 아우드리스 워자스 바츠카스 추기경도 “악마의 일이다”라고 비판했다.

대통령 취임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이 스캔들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국내외로 퍼져갔다. 언론들은 롤리쉬빌리를 제정 러시아 시대에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라스푸친 신부에 비교하고 있다. 영국의 BBC 방송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 가입을 앞둔 리투아니아가 이같이 시대착오적인 스캔들로 국가 이미지를 떨어뜨리고 있다며 우려했다. 결국 침묵으로 일관하던 팍사스 대통령은 3월13일 “롤리쉬빌리와의 관계는 사적인 것이며 그는 국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해명 성명을 발표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개인적인 교분을 맺는 것은 대통령의 자유지만 취임식 공개석상에서 입맞춤을 하는 등 롤리쉬빌리의 존재를 대중 앞에 드러낸 것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롤리쉬빌리 스캔들은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심리적 불안감이 팽배해 있던 리투아니아 사회에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을 부추기는 부작용까지 낳고 있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제 375호 2003년 4월 3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