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얘기2024. 4. 1. 15:18

해외에 살면서 재외국민으로서 긍지를 느낄 때 중 하나가 바로 대선과 총선에 참가하기 위해 대사관에 가서 투표하는 일이다. 국민의 권리를 다해야 한다는 거창한 책임감보다는 한국인으로서의 인연을 이어가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 때문이다.  

 

이번에도 재외선거인 등록 기간(2023년 11월 12일부터 2024년 2월 10일까지)을 놓치지 않고 제시간에 등록했다. 상호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만 리투아니아에는 아직까지 한국 대사관이 설립되지 않아서 폴란드 대사관이 겸임 관할하고 있다. 예전에는 관할 대사관에서만 투표할 수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가까운 대사관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거주 도시 빌뉴스에서 폴란드 바르샤바까지는 500 km (6시간 30분)이고 라트비아 리가까지는 320 km (4시간)이다. 

 

한국 국적도 가지고 있는 대학생 딸 요가일래에게 관심이 있으면 재외선거인으로 등록하라고 주소를 일러주었다.

"이번에 너 나이 숫자와 일치하는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데 갈지 안 갈지는 나중에 결정하고 관심 있으면 한번 등록해봐라."

 

22대 총선 투표했어요!!!

등록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3월 19일 주라트비아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투표일 안내 편지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주라트비아대사관입니다.
동 메일은 재외투표 안내 메일이며, 사전에 국외부재자 신청을 하신 분들께 송부되는 메일입니다.
주라트비아대사관 재외투표소 운영기간은 3.29(금) - 4.1(월)이며, 운영시간은 08:00-17:00 이오니, 동 기간 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투표소 방문 시, 여권, 주민등록증, 공무원증, 운전면허증 등 사진이 첨부된 신분증을 지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상세 내용은 별첨 안내문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라트비아대사관 재외투표소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주소 : Jura Alunāna iela 2, Centra rajons, Rīga, LV-1010, 3층


이제 투표일 안내를 받았으니 4일 동안 지속되는 투표기간에서 하루를 선택해야 한다. 이 기간은 부활절 경축일과 겹치는 황금기간이다. 리투아니아인 아내는 따뜻한 남유럽으로 여행 가려고 여러 후보지를 한창 찾고 있다.

 

"나, 29일 투표하러 라트비아 리가로 갈 거야!"

"교통비와 식사비가 꽤 나올 텐데 간다고?! 유권자수가 수천만 명이 넘는 나라에서 당신 한 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 가기를 바라는 말투다. 은근히 남편을 미친 투표쟁이로 여기는 듯하다. 그래도 아내는 일말의 여지를 남긴다.

 

"혹시 요가일래도 등록을 했는지 저녁에 돌아오면 물어봐."

 

요가일래는 빌뉴스대학교 마지막 학년에 다니고 있다. 1월부터 졸업일이 있는 6월까지 대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없고 졸업논문을 쓰면서 의무적으로 3개월 동안 전공과 관련한 기업이나 기관에서 실습을 해야 한다. 무급 실습이니 고용주에게는 전혀 부담이 없다. 인력을 보충할 수도 있고 미래의 인재를 키울 수도 있다. 요가일래는 현재 국무총리실과 외교부 두 군데서 실습을 하고 있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자 물어본다.

 

"아빠는 곧 라트비아로 가서 국회의원 투표를 하는데 너도 제외선거인으로 등록했니?"

"당연 했지."

"라트비아 대사관에서 온 투표안내문을 받았니?"

"편지함을 확인해볼게."

 

큰 기대하지 않고 등록 주소를 알려주었는데 등록을 했구나! 이제 두 사람이 왕복 640 km를 이동해서 투표하러 간다. 기차나 버스를 가면 1인당 왕복 교통비만 50 유로다. 둘이니 100 유로다. 이재에 밝은 아내가 머리 계산기를 두드린다. 

 

"이동거리 640 킬로미터. 100 킬로미터당 소요되는 경유는 6리터. 1 리터에 1.5 유로. 9유로다. 총 기값 60유로! 승용차로 가는 것이 유리하네. 모처럼 가족이 리가 구경도 하고 또 인근에 있는 유르말라도 가볼 수 있고..."

 

아내는 "아버지와 딸" 투표에 승용차로 동행하기로 결정한다. 원래 계획은 아침 일찍 출발해 투표를 한 후 리가를 구경하고 유르말라에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후에 출발해 유르말라에서 자고 다음날 투표하러 가기로 했다.

 

유르말라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6시 30분이다. 일몰 시간이 오후 6시 59분이다. 숙소 열쇠를 받자마자 바다로 향한다. 유르말라에서 발트해 일몰을 본다. 아직 일몰은 바다 쪽이 아니라 육지 쪽이다. 

 

 

다음날 인근에 있는 체메리 국립공원 습지 둘레길을 산책을 한 후 투표를 하기 위해 대사관으로 향한다.

 

체메리 국립공원 습지 둘레길

대사관이 밀접한 곳에 위치한 곳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쉽게 찾아 아르누보 건축물의 곡선 계단을 따라 3층을 올라간다. 안내자의 도움으로 작은 투표장에서 투표를 한다. 비례대표를 뽑는 종이가 그야말로 두루마기다. 내가 누른 붉은 잉크가 접으면 번져서 무효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혹시 접으면 잉크가 번지지 않나요?"

"번지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그래도 먼거리를 와서 투표하는데 무효표가 되지 않도록 살짝 입김을 불어서 말려 본다. 

 

투표장을 나서면서 인증샷을 찍는다.

 

 

배가 꼬르륵~~~ 발걸음을 리가에 있는 한국 식당으로 옮긴다. 마치 시골 5일장에 와서 물건을 사고팔고 한 후 맛있게 식사를 하는 기분이다. 가족 계좌 카드가 아니라 내 개인 계좌 카드로 밥값을 폼나게 낸다. ㅎㅎㅎ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토트넘 손흥민 축구 경기를 본다. 경기 86분에 손흥민이 극적인 역전골을 넣으니 오늘 우리 부녀가 투표한 것을 마치 축하라도 하는 듯하다. 기분 좋게 라트비아 맥주 캔을 딴다. 모두 투표에 참가하세요!!!!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12. 12. 11. 07:21

초유스의 동유럽 블로그 "이동거리 천km이지만, 재외선거인으로 등록"  글에서 재외선거인으로 등록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막상 등록은 했지만, 재외선거인 투표일이 가까와지자 초심이 흔들렸다.

선거인 등록할 때 리투아니아인 아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투표하러 가기 위해 교통편을 알아보고, 왕복 국제선 버스표를 구입하려고 하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날씨도 안 좋아서 남부 유럽에서는 폭설이 쏟아지고 점점 북상한다고 예보되었다. 또한 주말에는 딸아이가 음악학교 연주회에서 공연뿐만 아니라 연주회 전체 사회까지 처음으로 맡았다. 관람도 하고 촬영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래도 투표하러 가야지." 
"당신 한 표가 뭐 중요하겠어. 투표장이 바로 옆이라도 안 가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왕복 1000km로 이동해 투표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정상이 아니고, 거칠게 말하면 미친 짓 아니야?"
"당신도 잘 알잖아. 1이 없으면 천만도 없어. 이왕 등록했으니 가야 그 등록됨이 보람있잖아. 딸아이 공연은 이번 달 다음에도 있을 것이지만 투표는 5년마다 딱 한 번이야. 재외 대선 투표는 첫 번째야. 갔다올 테니 그냥 마음 편히 있어."


이렇게 12월 7일 금요일 낮 2시 45분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를 출발해 바르샤바까지 국제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버스에는 모든 좌석마다 모니터가 있어 인터넷 하기와 영화 보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버스비는 편도가 한국돈으로 약 2만5천이었다. 버스 타고 가는 길을 틈틈히 카메라로 찍어보았다.   


금요일 현지 시간으로 밤 10시 30분 바르샤바 중앙역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거의 9시간 소요되었다. 다행히 폴란드 현지인 친구가 늦은 시간이지만 마중나왔다. 모처럼 만난 자리였다.

"이번에 바르샤바에 온 목적은?"
"대사관에 대통령 선거하러 왔어. 한국은 이제 재외국민도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을 수 있어."
"빌뉴스에는 대사관이 없어?"
"아직 발트 3국에는 대사관이 없고 이웃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어."
"와~~ 정말 애국자다. 그렇게 먼거리를 이렇게 오다니."
"그래 난 (아내가 말하는 대로) 미친 (네가 말하는 대로) 애국자야!"

다음날인 12월 8일 토요일 오전 폴란드 대사관을 방문했다. 넓은 공간에 선거 관계자를 제외하고 바로 그 시각 투표하러 온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관계자는 폴란드 재외유권자는 약 950여명이고 재외선거인으로 등록한 사람은 450여명, 그리고 그때까지 투표한 사람은 150여명이라고 했다.


9일 밤버스를 타고 10일 아침 빌뉴스에 도착했다. 눈이 엄청 내려 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소중한 주권 한 표를 행사한 것에 크게 만족한다. 미친 애국자라 불렸지만 마음만은 뿌듯하다. 

투표장 현장에 직접 가서 투표하기는 이번 재외선거가 마지막이길 바란다. IT 강국이라고 세계에 자랑질만 하지 말고 다음 정부는 전자투표를 빠른 시일내에 실행하길 촉구한다. 정당의 이해 관계로 전체를 한꺼번에 하기 어렵다면 재외투표부터 먼저 할 수도 있겠다. 더불어 임시공휴일로까지 지정된 투표일에 더 많은 국내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가해주면 좋겠다. 12월 19일!!! 투표일!!!!

* 후기: 의지를 가지고 그냥 주권 한 표를 행사했을 뿐인데, 훈훈한 댓글로 격려해주시는 누리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본인이 원하는 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한국과 국민 개개인의 생활이 더 나아지길 바랍니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