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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벌써 벚나무의 꽃이 지고 잎이 무성해지고 있을 것이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북동유럽 리투아니아에도 과연 벚나무가 자랄까? 자란다. 하지만 키가 크고 웅장하게 자라며, 꽃이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왕벚나무는 자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네리스 강변에는 바로 이 왕벚나무가 자라고 있고, 요즘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아직은 크게 자라지 않아 운치는 한국만큼 못하지만 그래도 한국이나 일본의 봄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
그러면 자생하지 않는 왕벚나무가 어떻게 빌뉴스에서 자랄까? 이야기는 8년 전인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인 지우네 스기하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최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성대하게 열렸다. 스기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사증을 발급해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 빌뉴스 스기하라 기념비와 갓 심어진 왕벚나무
2001년 10월 빌뉴스를 동서로 가르는 네리스강(江) 부근 경관 좋은 언덕에 열린 이 행사에는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 대사 쇼헤이 나이토, 스기하라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88세), 와세다대학교 관계자 등 20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정치인과 예술인, 리투아니아의 정치인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어, 일본어, 영어로 쓰여진 약력과 함께 스기하라 기념비를 제막했고, 그 주변에 100그루의 벚꽃나무를 심었다.
"리투아니아와 일본에 있어 나무에 대한 존경은 인간애와 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경처럼 지대하다. 리투아니아에 심어지는 이 일본 나무들의 뿌리는 두 나라 국민간 친선을 더욱 강화하는 데 도울 것이다"라고 아담쿠스 대통령은 축사를 하였고, "스기하라의 영웅적인 행동은 61년 전 유대인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와 일본간 우호관계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라고 나이토 대사는 말했다.
이 벚꽃나무는 일본 북부지방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스기하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벚꽃나무로 빌뉴스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빈, 독일 베를린에 이어 일본 벚꽃나무 공원이 조성된 세 번째 도시가 되었다.
2차 대전 초기 1939-1940년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근무했다. 독일에 공포를 느낀 리투아니아, 폴란드 심지어 독일 출신 유대인들은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다. 그 당시 소련은 일본의 사증을 받으면 자국을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영사관 밖에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본국 정부에 사증 발급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 정부는 사증을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이 훈령을 무시하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약 6,000개의 통과사증을 발급했다. 이 스기하라의 '생명의 사증'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은 소련과 일본을 거쳐 제3국으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에 관계없이 사람을 구한 스기하라의 용기 있는 인도적 행동은 오늘날 시대에도 소중한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스기하라의 아름다운 인류애가 아름다운 벚꽃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하지만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네리스 강변에는 바로 이 왕벚나무가 자라고 있고, 요즘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아직은 크게 자라지 않아 운치는 한국만큼 못하지만 그래도 한국이나 일본의 봄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
그러면 자생하지 않는 왕벚나무가 어떻게 빌뉴스에서 자랄까? 이야기는 8년 전인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인 지우네 스기하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최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성대하게 열렸다. 스기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사증을 발급해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사진설명]-(위)기념식수를 하는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대사, 리투아니아 외무부장관(앞줄 왼쪽으로부터)
/ 빌뉴스 스기하라 기념비와 갓 심어진 왕벚나무
2001년 10월 빌뉴스를 동서로 가르는 네리스강(江) 부근 경관 좋은 언덕에 열린 이 행사에는 리투아니아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일본 대사 쇼헤이 나이토, 스기하라 미망인 유키코 스기하라(88세), 와세다대학교 관계자 등 20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정치인과 예술인, 리투아니아의 정치인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어, 일본어, 영어로 쓰여진 약력과 함께 스기하라 기념비를 제막했고, 그 주변에 100그루의 벚꽃나무를 심었다.
"리투아니아와 일본에 있어 나무에 대한 존경은 인간애와 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경처럼 지대하다. 리투아니아에 심어지는 이 일본 나무들의 뿌리는 두 나라 국민간 친선을 더욱 강화하는 데 도울 것이다"라고 아담쿠스 대통령은 축사를 하였고, "스기하라의 영웅적인 행동은 61년 전 유대인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와 일본간 우호관계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라고 나이토 대사는 말했다.
이 벚꽃나무는 일본 북부지방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스기하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벚꽃나무로 빌뉴스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빈, 독일 베를린에 이어 일본 벚꽃나무 공원이 조성된 세 번째 도시가 되었다.
2차 대전 초기 1939-1940년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근무했다. 독일에 공포를 느낀 리투아니아, 폴란드 심지어 독일 출신 유대인들은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다. 그 당시 소련은 일본의 사증을 받으면 자국을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영사관 밖에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본국 정부에 사증 발급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 정부는 사증을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이 훈령을 무시하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약 6,000개의 통과사증을 발급했다. 이 스기하라의 '생명의 사증'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은 소련과 일본을 거쳐 제3국으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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