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파트 우편함에 흑백색 광고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화려한 색깔의 광고지가 남무하는 요즈음 흑백색광고지가 돋보였다.
살펴보니 외국어 학원이 보낸 광고지였다. 영국 옥스퍼드에 본부를 둔 어학원이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어학원을 개설했다는 소식과 9월 4일부터 개강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어학원이 가르치는 언어가 더욱 시선을 끌었다. 바로 영국 Edexcel 프로그램에 따라 외국어로서 러시아어를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6-18세 학생들에게 매주 토요일 2시간 반 가르치고, 학원비는 한달 68리타스(약 3만4천원)이다.
소련시대 공용어였던 러시아어는 리투아니아가 1990년 독립을 선언한 후부터 배척되었다. 소련시대 우대를 받았던 러시아어 교사들은 교직을 그만두거나 새로운 과목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때 많은 교사들이 영어나 리투아니아어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러시아어 대신 영어가 자리잡았다. 이 결과로 대부분 20-30세 이하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러시아어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이 광고지를 접하고 보니 20년 세월이 지난 후 사람들이 조금씩 러시아어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딸아이 요가일래(8살)을 3년 동안 러시아어 유치원을 다니게 한 것이 좋은 결정이었다고 재확신했다. 리투아니아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러시아어를 점점 잊어버리고 있는 요가일래에게 이 어학원을 권하자고 아내와 상의했다.
최근 시골 고향에서 고기계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리투아니아 퇴임 기계학 교수를 취재하려 다녀왔다. 만남 인사를 마친 후 그의 첫 물음은 리투아니아인 아내와 집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인가였다. 모국어가 서로 다른 부부에게 제일 궁금한 중 하나가 "저들은 부부 사이, 자녀와 부모 사이 도대체 무슨 언어로 의사소통할까?"이다.
의사소통 언어가 “에스페란토”라 답하니 "아직도 에스페란토가 살아있냐?"며 놀라워했다. 에스페란토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지만, 오래 전 에스페란토를 알던 사람들 중에도 에스페란토가 벌써 죽은 언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에스페란토는 우리 집 공용어로 매일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와 같은 에스페란토 맺어진 다문화가정이 세계 도처에 있다.
집에 돌아와서 편지를 확인하니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한국의 젊은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이 누리망에 퍼져 있는 에스페란토 안내 동영상에 한국어 자막처리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선봉에 서서 한국어보다 영어를 강화시키고, 부모들이 영어 발음을 위해 자녀에게 혀 수술까지 시키는 사회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에스페란토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데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에스페란토는 자멘호프(1859-1917)가 188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발표한 세계 공통어를 지향하는 언어이다. 변음과 묵음 등이 없어 적힌 대로 소리 내고, 품사어미와 강조음 등이 규칙적이어서 익히기 쉽다.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은 "1민족 2언어 주의"에 입각해 언어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다른 민족과는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것을 지향한다.
자멘호프가 태어난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령인 지금의 폴란드 비얄리스토크는 당시 여러 민족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고, 민족간 불화와 갈등이 빈번했다. 자멘호프가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중립적인 공통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유럽 여러 언어들의 공통점과 장점을 활용해 규칙적인 문법과 쉬운 어휘를 기초로 에스페란토를 창안한 이유다.
"지금 처음으로 수천 년의 꿈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여기 프랑스의 작은 해변도시에 수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다. 서로 다른 민족인 우리는 낯선 사람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자기 언어를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는 형제로 모였다. 오늘 영국인과 프랑스인,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이 만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과 사람이 만났다." 1905년 제1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에서 행한 자멘호프의 연설은 한 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어몰입교육이 판치는 한국 상황에서는 힘들겠지만, 한번 에스페란토를 배워보고자 하는 사람은 한국에스페란토협회(02-717-6974)나 에스페란토문화원(02-777-5881; 010-3340-5936)에 문의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한편 http://lernu.net/에서 직접 배울 수도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원광대 등에 에스페란토 강좌가 정식으로 개설돼 있다. 한국어 자막이 되어 있는 아래 에스페란토 안내 동영상(E@I www.ikso.net 제작)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에스페란토를 알아볼 수 있다.
▲ 어느 날 우리 집 탁자에 체코,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리투아니아, 한국에서 온 8명 친구들이 의사소통 장애 없이 에스페란토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국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결혼한 부부 10쌍 가운데 1쌍이 외국인과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한국에서도 다문화가정이 이젠 낯설지가 않다. 다문화가정이 안고 있는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외국인 배우자와 2세들의 언어문제일 것이다.
지난 여름 곧 일곱 살이 될 딸 요가일래와 함께 한국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딸아이가 어떻게 어느 나라 말을 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제일 궁금해 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글을 정리해서 올린다.
요가일래 엄마는 리투아니아인이고, 아빠는 한국인이다. 요가일래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 리투아니아어, 러시아어, 영어, 에스페란토이다. 아래 영상에서는 요가일래가 5개 국어로 노래를 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리투아니아어도,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에스페란토로 만났다.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우리 부부의 일상 언어는 에스페란토이다. 이런 언어환경에서 요가일래가 다섯 개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래와 같은 원칙 때문이다.
1. 모태부터 지금까지 아빠는 무조건 한국어로만 말한다. 만 1세경부터 한국어 비디오테잎을 그냥 틀어놓았다. 자연스럽게 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 3세경부터 한국어 인터넷 학습 사이트를 활용하고 있다.
2. 엄마는 무조건 리투아니아로만 말한다 (원칙: 어느 한 쪽이 두 말을 절대로 섞지 말 것. 적어도 만 3살이 되도록까지).
3. 소련으로부터 독립 후 리투아니아엔 영어가 현재 러시아어를 밀어내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러시아어가 다시 중요한 언어로 부각될 것이라 생각해 러시아어 어린이집에 다니도록 했다.
4. 영어 만화채널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유롭게 보도록 했다. 어린이집에 갔다오면 잘 때까지 거의 영어채널을 틀어놓는다. 영어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아이가 스스로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했다.
5. 부모는 늘상 에스페란토를 사용한다. 아이는 부모 대화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언어를 습득한다.
한국 다문화가정의 언어교육의 실상이 어떠한 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엄마가 베트남인이면, 늘 아이에게 베트남어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또한 아이가 커서 엄마의 친척들과 대화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아빠도 조금씩 베트남어를 배워갈 수 있다. 한국에 산다고 한국어만 강요하지 말고, 배우자의 언어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 가정의 예가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