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뉴스에서 열린 노래축제의 떠들썩한 현장… 
통일의 역사를 주제로 민족애 고취 


빌뉴스=글·사진 최대석/ 자유기고가 chtaesok@hanmail.net

19세기 중반 유럽에 대중 노래부르기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1843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유럽 최초로 노래축제가 열렸는데, 이것이 대규모 아마추어 합창단과 음악단체 합동공연의 효시다. 이 전통은 1935년까지 92년간 지속되었다. 독일에서 1845년, 에스토니아에서 1869년, 라트비아에서 1873년에 각각 대형 노래축제가 처음 열리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억압으로 다른 나라보다 늦은 1924년에야 비로소 노래축제를 처음 열었다. 음악·노래·무용 등에 종사한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관객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대형 축제를 벌였다. 리투아니아인은 초기부터 노래축제를 통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민족결속을 다지며, 조국애를 함양하고, 민족문화를 전승하고자 했다. 

리투아니아 민족 노래축제는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정신에 기반을 두고 4년마다 여름철에 개최된다. 노래축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리투아니아 민족의 가장 큰 여름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는 16번째 행사로 6월30일∼7월6일에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려 무용인·가수·악사·민속예술인 등 모두 2만8천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공연을 했다. 미국·캐나다·브라질·오스트레일리아·독일·라트비아·폴란드·러시아·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리투아니아 노래와 춤을 애호하는 리투아니아인 1천여명이 참가했다. 


사진/ 7000명이 출연한 리투아니아 전통춤 공연 한 장면(왼쪽) [실제 사진 설명은 7000명이 출연한 리투아니아 전통춤 공연 한 장면]. 행사 내내 도심 곳곳에서 즉석 노래와 춤 공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오른쪽).


전통의상 패션쇼 인기폭발 

21세기 들어 처음 여는 이 노래축제는 리투아니아 역사와 상호 주제를 결부한 첫 행사였다. 민다우가스 대공은 리투아니아 땅을 통일한 뒤 1253년 7월6일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최초의 왕이자 마지막 왕이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다시 대공 체제로 수세기를 내려왔다. 이번 노래축제는 그의 왕위 즉위식 750년을 기념하여 그의 동상을 리투아니아 국립박물관 앞 광장에 세웠고, 그의 이름을 딴 다리도 개통했다. 민다우가스 왕은 오늘날 리투아니아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노래축제는 19세기 리투아니아 민족 전통의상 패션쇼로 시작되었다. 패션쇼는 입장료가 100∼400리타스(약 4만∼16만원)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관람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리투아니아 전통의상은 주로 아마(亞麻)를 이용해 베틀로 짠 천으로 만들었다. 의상 무늬도 바늘로 수를 놓은 것은 드물고 거의 다 베로 짠 것들이었다. 리투아니아 아욱쉬타이티야·제마이티야·주키야·수발키야 지방에서 입은 전통의상 86벌이 선보였다. 이들 네 지방의 전통 복장은 구성은 큰 차이가 없으나 모양은 현저하게 다르다. 비옥한 땅을 가진 수발키야 의상은 고급스럽고 정교하다. 치마에 작은 창 무늬가 새겨져 있고 비교적 엷은 색을 띠고 있다. 아욱쉬타이티야 의상과 제마티야 의상은 리투아니아 표현을 빌리면 ‘주야지차’(천양지차라는 뜻임)다. 전자는 흰 머리수건과 무늬가 적은 치마로, 후자는 붉은 머리수건과 다양한 색의 치마로 특징지어진다. 이날 패션쇼는 특히 출연자들이 무언극 형태로 재미있게 촌극을 해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캉클레스의 아름다운 선율 

또 리투아니아 최고의 뮤지컬로 평가받는 <악마의 신부(新婦)>가 빙기스 공원 야외공연장에서 현대적으로 각색되어 공연되었다. <악마의 신부>는 리투아니아의 고대 민담을 근거로 1974년에 제작된 리투아니아 최대 흥행 영화이자 첫 영화 뮤지컬이다. 이 뮤지컬은 천사가 되었지만 호산나를 노래하는 것을 지겨워한다는 이유로 땅에서 살도록 명령을 받은 장난꾸러기 악마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악마는 풍차 방앗간의 딸과 사랑을 추구하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유쾌하고 비극적인 장면 속에 리투아니아 시골풍경이 모두 담겨 있다. 공연장에 나온 관람객 2만여명은 30여년 전을 회상하며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사진/ 자라세이 시에 온 율리야·테레사 쌍둥이 자매(8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빌뉴스 옛 시가지의 넓은 세레이키쉬케이 공원과 게디미나스 성 주변에는 행사기간 중 하루종일 노랫소리와 춤이 끊이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온 리투아니아 민속앙상블 250개가 곳곳에 자리잡고 각 지방 민속노래와 춤을 공연했다. 이들 주위에서는 띠를 짜는 등 민속예술 장인들이 솜씨를 뽐냈다. 대부분 민속앙상블은 남녀노소로 이루어졌다. 전통의상을 입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서 수세기의 리투아니아 문화가 주변 강대국의 억압 속에서도 고스란히 자손 대대로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고대부터 리투아니아인은 혼자 노래하는 것보다는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들은 남들이 자신들의 노래를 들어주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함께 노래 부르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1579년 세워진 유서 깊은 빌뉴스대학교 정원도 캉클레스의 아름다운 선율과 관람객들의 뜨거운 시선으로 가득 찼다. 이날 70개 음악학교, 5개 음악고등학교, 2개 음악대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이 캉클레스 대연주를 했다. 캉클레스는 현악기로 리투아니아의 민속음악을 특징짓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다. 보리수, 단풍, 떡갈나무 등으로 만들며 0.1∼1mm 굵기의 철사가 현(鉉)을 이루고 있다. 현의 수는 다양하다. 작은 캉클레스의 장중한 합주 소리를 들으니 소수민족의 몸 속에 꿈틀거리는 민족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헤아릴 수 있었다. 

노을이 아직 서쪽 하늘에 걸려 있는 여름밤, 4500명이 참가한 노래와 춤 공연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캉클레스를 비롯한 민속악기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춘하추동을 주제로 다양한 춤들이 선보였다. 봄철에 타는 그네가 한국의 단오절을 연상케 해 가슴에 와 닿았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봄철에 그네를 타면서 그해의 성공도를 예측한다. 즉, 자기가 구른 그네의 높이가 그해의 성공도를 말해준다. 여름철 숲 속의 요정들이 치는 나무 방망이 소리는 꼭 한국의 옛 어머니들이 두드리는 빨래 방망이 소리 같아 몹시 정겨웠다. 나막신을 신고 추는 춤도 압권이었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이번 노래축제는 과거와는 달리 7일간이나 지속되었다. 마지막 날이 민다우가스가 왕으로 즉위한 지 750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라 의미가 더욱 컸다. 이날 주제도 ‘조국을 위한 왕관’으로 정했다. 이날 오후 많은 국내외 단체들이 마지막 행사인 대합창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대성당 광장에서 빙기스 공원까지 장관을 이루며 거리행진을 해 연도에 나온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서 갈채를 받았다. 이 합창에는 어린이 합창단 220개, 성인 합창단 200개, 오케스트라 71개 등 모두 1만8천명이 참가했다. 웅장한 소리가 늦은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어갔다. 

노래축제를 통해 민족문화의 전통을 면면히 잇고자 하는 리투아니아인의 노래 사랑과 함께 민족애와 조국애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노래축제는 리투아니아 민족 정체성의 최고 문화표현으로 자리잡고 있다. 노래축제의 중요성을 인식한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은 최근 유네스코에 이 노래축제를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되면 노래축제는 한층 높은 위상을 정립하고, 국내외로부터 더 많은 문화관광객을 유치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 이 기사는 한겨레21 제469호 2003년 7월 23일자로 이미 보도된 내용이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