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얘기2009. 2. 2. 16:29

리투아니아 겨울이 싫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몹시 추운 날씨에 쉽게 방전이 되어버리는 밧데리 때문이다. 추운 날 자동차 시동이 걸리면 그보다 기분 좋은 일은 없다. 하지만 가끔 방전이 되어버린 밧데리로 아내와 실랑이를 벌린다.

어제 아침 일어나니 영하 15도였다. 엊그저게 차로 충분히 이동해서 그런지 좀 힘겹웠지만 차 시동이 걸려서 계획대로 일을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에도 별 일 없으리라 기대했다. 한편 날 풀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결혼기념일인 2월 2일 오늘 아침 일어나니 영하 18도였다. 머리 속에는 결혼기념일보다는 밧데리가 먼저 떠올랐다. 엄마가 학교 직장에 가는 날엔 보통 초등학교 일학년 딸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 준다.

아침 7시 30분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고 있다. 눈과 얼음으로 덮힌 인도를 조심스럽게 빠른 걸음으로 학교로 딸아이와 갔다. 돌아오는 길엔 온통 밧데리 생각뿐이었다. 시동이 걸려야 할텐데......

아내의 시동걸기 요령
1. 히타를 꺼놓는다
2. 열 차례 예열을 시킨다 (시동 걸기전 키를 ON 위에 놓는다)
3. 마지막 예열시 1초간 전조등을 켰다가 끈다

학교로 향하기 전 아내는 위의 시동걸기 요령을 숙지시켰지만, 머리 속엔 "또 다시 밧데리 방전으로 고생을 해야 하나?" 생각만이 가득 찼다.

시동걸기 요령으로 해보았지만, 밧데리가 영하 18도를 견디지 못하고 방전되었는지 힘 없는 이잉 이잉 소리를 두 서너 차례냈다. "아, 이젠 25kg이나 나가는 밧데리를 3층에 있는 집까지 옮겨야 하나?"라고 생각하니 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늘 같은 결혼기념일엔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밧데리가 좀 견뎌주면 안되네......
낑낑거리며 밧데리를 들고 집으로 올라오자 아내는 아침식사로 리투아니아식 아니면 한국식으로 먹을 것이냐고 물어온다.

밧데리로 시름한 기분으로 퉁명하게 "아직 안 먹겠다"고 답하고 말았다. 사실 이런 대답의 배경엔 밧데리에 대한 아내와 갈등이 있다. 이 밧데리는 2003년 구입한 것이다. 밧데리는 소모품이다. 지난 해에도 몇 차례 집에서 충전하다가 결국 새 밧데리를 구입하고자 가게에 갔다. 가게 주인이 밧데리를 점검하더니 이렇게 멀쩡한 밧데리인데 새 것으로 교체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아내는 새 것을 사지 않을 확실한 명분을 얻게 되었다. 올 겨울 초반 날씨가 따뜻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중반에는 브라질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돌아온 최근 이렇게 영하 15도 내외 날씨가 지속되어 밧데리 방전으로 고생하고 있다. 아내는 곧 봄이 올텐데, 새 밧데리 구입하지 말고, 충전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낑낑 거리며 차에서 집으로, 집에서 차로 옮겨야 하는 남편의 심정을 좀 헤아려주지......
하기야 새 것을 구입한다 해도 영하 20도 날씨에 방전되지 않으려는 법이 없으니......

밧데리로 영육이 고생해서 그런지 날씨 좋은 브라질이 다시 그리워지는 결혼기념일 아침이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