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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빅토르 초이(Виктор Цой, Viktor Tsoi, Viktor Coj, 최빅토르, 빅토르 최)가 사망한 지 30주년을 맞는 해이다.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최고 의결기구)는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15개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소련을 해체했다. 아직은 소련이던 시절 1990년 11월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체코 프라하를 출발해 우크라이나를 거쳐 리투아니아를 방문했다. 이때 만난 현지인들로부터 많이 받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혹시 빅토로 초이를 알아?"
"빅토르 초이?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아버지가 한국인이야. 소련에서 아주 유명한 가수지."
"그렇다면 초이는 나와 같은 성(姓)인 최일게다. 로마자로 보통 choi(tsoi)로 쓰니까."
"우와 성이 같다니 축하해."
나중에 그에 대해 좀 더 알아보니 초이(Цой)는 한국인 성 최(崔)의 러시아어식 표기다. 공교롭게도 그는 나와 같은 성에다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빅토르 초이는 아버지 고려인 로베르트와 어머니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발렌티나 사이에 1962년 6월 21일 레닌그라드(소련 붕괴 후 상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어머니가 교사로 일하던 학교를 다녔고 1977년 예술중학교를 졸업했다. 1977년 세로프(Serov) 예술대학에 입학했으나 얼마 후 학업성적 부진으로 퇴학당했다. 이후 기술대학에서 목각술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그림, 조각, 노래 등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7세에 작곡을 시작했다. 1970-80년대 당시 소련에서 록음악 활동은 주로 레닌그라드에서 이뤄졌다. 모스크바 팝송 가수들은 소련 정부의 호의를 받은 반면에 록음악은 저항음악으로 간주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록음악가들과 교류하면서 활발한 작곡과 연주 활동을 했다. 주로 레닌그라드 거리의 삶을 노래에 담았다.
1981년 여름 알렉세이 리빈(Алексей Рыбин)과 올레그 발린스키(Олег Валинский)와 함께 "가린과 쌍곡선"(Гарин и Гиперболоиды) 그룹을 결성했다. 얼마 후 올레그가 군입대를 하자 1982년 봄 그룹명을 "키노"(Кино, 극장)로 변경하고 첫 앨범 45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45는 앨범 재생시간이 45분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이 앨범에 실린 노래 "Elektrichka"(전차, 교외통근전차)의 가사를 한국어로 한번 번역해봤다.
어제 늦게 잠들고 오늘 일찍 일어났어.
어제 늦게 잠들고 거의 자지도 못했어.
아마 아침에 의사한테 갔어야 했는데
지금 기차가 내 가고 싶지 않은 데로 날 데려가.
기차가 내 가고 싶지 않은 데로 날 데려가.
객실입구는 춥기도 하고 다소 따뜻하네.
객실입구는 연기도 나고 다소 상큼하네.
왜 난 침묵해, 왜 난 소리치지 않아? 난 침묵해.
기차가 내 가고 싶지 않은 데로 날 데려가.
이 가사에서 그는 개인이 원하지 않은 곳으로 전차가 끌고 가는 소련체제의 부조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곧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변화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고 큰 인기를 끌었다. 곧 소련 당국에 의해 공공장소에서의 공연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공연이 펼쳐졌고 앨범은 소련 전역으로 널리 펴졌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1986년부터 다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전국 순회공연까지 돌입했다. 1990년 6월 24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2018년 월드컵 축구경기장, 구명칭 레닌 스타디움)에서 열린 키노의 마지막 순회공연에는 6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1988년 출시된 키노의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은 키노 앨범 중 국내외로부터 가장 큰 인기를 얻었다. 타이틀곡 혈액형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는 노래로 꼽힌다. 1986년부터 "휴가 끝", "아사", "바늘" 등에서 영화배우로도 활약했다.
모스크바 공연을 마친 후 프랑스에서 새 앨범을 녹음하기 전 키노 그룹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빅토르는 라트비아 최고의 여름 휴양지 유르말라 근교 플리엔치엠스(Plieņciems) 마을에 있는 집을 임대해 친구들과 여름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노래가 되어 버린 "뻐꾸기"(Кукушка)가 만들졌고 데모녹음되었다. 이때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990년 8월 15일 새벽 5시 승용차 모스크비치-2141를 혼자 몰고 인근 숲속 호수로 낚시를 떠났다. 이날은 해가 쨍쨍한 맑은 날씨였다. 대낮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일어났다. 유르말라 슬로카-탈시(Jurmala Sloka-Talsi) 도로 35km 지점에서 11시 28분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오는 빈 버스(Ikarus-250, 운전사 Janis Karlovich Fibex)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관련 참고기사]. 교통경찰의 공식조사에 따르면 빅토로의 졸음운전 사고였다.
그의 죽음에는 음모론도 있다. 그는 변화의 상징이었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1990년 3월 11일, 라트비아는 1990년 5월 4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 공산체제의 붕괴를 막고자 했던 강경보수파 세력에 의해 그가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8월 19월 레닌그라드 보고슬로브스키 묘지(Богословский кладбище)에서 빅토르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때 5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추모했다. 충격으로 그를 따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키노의 "최후의 영웅"(Последний герой) 앨범 타이틀처럼 그는 당시 세대에게 최후의 영웅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사망한 지 30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추모 모임 등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9월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서 그의 추모벽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편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점(구글 좌표 57.1154804, 23.1857539)을 직접 다녀왔다.
유르말라 마요리 기차역 앞 주차장을 떠나 128번 도로를 따라 탈시(Talsi)로 향해 간다. 44km 되는 지점이 바로 그 위치다.
포장된 시골 도로가 나온다. 왕복 2차선 도로다. 도로 양옆으로 소나무,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도로다. 위급시 도로 바깥으로 운전대를 돌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저 앞 완만하게 굽어지는 곳을 벗어나면 곧 사망지점이 나온다.
사망지점에는 그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Viktors Cojs는 빅토르 초이의 라트비아어식 표기다.
구소련 전역에서 팬들이 성금을 모아서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의 모습은 2018년 12월에 새롭게 단장된 것이다.
팬들이 이곳을 방문해 담배 한 개비씩을 그에게 바치면서 그의 노래 "담배 한 갑"을 떠올렸을 것이다. 갑자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 중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가 생각난다.
기념비 앞에는 사진, 촛불, 사탕, 담배, 인형, 음료수, 초콜릿 등이 놓여 있다. 이렇게 음식 등을 보고 있으니 한국의 성묘풍습이 떠오른다.
빅토르 팬들의 좌우명 "Цой жив!"(초이는 살아있다!)를 새삼스럽게 확인해본다.
빅토르 반신상이다.
사망지점을 영상으로도 담아봤다. 라트비아 빅토르 팬클럽 유튜브 채널(35km.lv)에서 더 많은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다. 나도 이제 빅토르 초이와 친해져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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