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얘기2015. 10. 28. 07:50

지난 주중에 왕복 1000킬로미터 문상을 다녀왔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살고 있는 친구 라덱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9월에 심장마비 증세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여러 일로 바빠서 병문안을 가지 못했다. 10월에 한번 다녀올 생각을 하고 있는 중 부고를 받아 마음이 더욱 아팠다. 화장일을 맞춰 다녀왔다. 1991년 1월부터 알고 지내왔으니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술을 권했다. 거절하는 나에게 한국말로 "절반?! 절반?!"이라고 자꾸 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망과 문상 이야기를 풀고자 한다.    

죽어도 살아 있다
9월 5일 토요일 아침 무렵 꿈을 꾸다가 깜짝 놀라 깨어났다. 1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다. 어머니는 발밑에 있는 이불 끝자락을 잡아 당기면서 "라덱(아들 이름), 빨리 일어나!"라고 외쳤다.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평소 꿈에 나타나지 않는데, 이날 꿈 장면이 하도 생생해서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 라덱이 여러 해를 걸쳐 직접 지은 집 


꿈이 너무 이상해 어머니 사후 아파트에서 혼자 사시는 아버지에게 급히 전화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들어 즉시 옷을 갈아입고 아파트 열쇠를 챙겨 차를 몰았다. 아파트에 들어가니 아버지(78세, 1938년생)는 거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희미한 의식은 있지만, 가쁜 숨을 힙겹게 내쉬었다.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탁자 밑에는 독한 맥주 빈병 3개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해 전 건강을 크게 잃은 후부터 술을 조금만 마시고 있고, 또한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술을 마실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순간 불길함이 뇌리로 몰려왔다. 즉시 구급대를 불렀다. 심장마비 증세였다. 심장이 10-15% 정도만 기능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경에 처해 있으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깨우게 된 것을 통해 아들은 "사람은 죽어도 살아 있다"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훨씬 전에 모스크바에 있는 이모가 9월 6일 방문하기 위해 기차표를 구입해 놓았다.   

그후 알게 된 그날 밤의 일이다. 보그단이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가 이렇게 된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크로아티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인사겸 찾아와서 선물로 가져온 보드카 200그램을 나눠 마셨다. 아버지는 맥주를 마시지 않고 보드카를 조금 마셨다고 한다. 친구가 돌아간 후 아버지는 술김에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혼자 다 마셨다. 며칠 후 아내의 기일이라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병세는 호전되었으나 한 순간에 유명을 달리
입원한 지 한 달 뒤부터 병세는 점점 호전되고 있었다. 매일 병실을 찾았다. 아버지 친구들도 틈나는 대로 병문안을 다녀갔다. 아버지는 자주 헛된 말을 했지만,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사지를 온전하게 사용하지 못하면서 자꾸 집으로 데려다달라고 했다. 집에만 가면 혼자 일어서서 걸을 수도 있고, 밥을 해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숟가락도 혼자 힘으로 들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번은 친구 스테판이 어젯밤에 찾아와서 함께 맥주를 마셨다고 했다. 병원에서 음주는 불가하므로 망령된 말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스테판 아저씨에게 이야기했더니 깜짝 놀랐다. 바로 어젯밤에 그가 아버지와 맥주를 마시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시는 날 동생이 찾아왔다. 지방에 살고 있어 쉽게 올 수가 없었다. 입원한 후 처음이었고,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두 형제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면서 평온하고 추억 어린 시간을 가졌다. 동생이 막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자, 형이 동생에게 귀속말로 "너는 피에댜(fiedja)야!"라 속삭였다. 동생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어린 시절 후부터는 한번도 듣지 못했던 별명을 형이 기억해 지금 말하고 있다니... 이들이 작별한 지 3시간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가 남은 가족을 생각해 데리고 가
아버지는 "바로 그날 심장마비 증세가 일어났을 때 돌아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기신 지 6개월 동안 아버지는 우울증 증세를 무척 고생하셨다. 어머니가 자꾸 부른다는 망상에 빠졌다. 정신과 진료를 받아서 약을 복용해봤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친구와 이웃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말친구가 되어 주었고, 소량이지만 이들과 한 두 잔 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우울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다. 

어느 정도 호전되더라도 의사는 심장이 20% 이상 기능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사지를 마음대로 쓸 수가 없으니 퇴원을 하더라도 누군가 24시간 간병을 해야 한다.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하기에 퇴원 후 간병을 여러 가지 궁리를 했지만 뽀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 그야먈로 태산이었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가 남은 가족을 생각해 아버지를 데리고 갔구나"라고 아들은 믿게 되었다.

숫자 17이 참으로 묘하다
어머니가 평소 좋아하던 숫자가 17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좋아했다. 가게에 가서도 17이 들어간 상품을 즐겨 구입했다. 그래서 그런지 돌아가신 날짜도 9월 17일이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짜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꼭 1년 1개월인 10월 17일이다. 

여러 해에 걸쳐 지은 집 층간 복도에 어머니가 정년퇴임 후 취미생활로 만든 자수 그림 작품 18점을 걸었다. 그런데 걸려있던 한 작품이 어느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어머니가 좋아하던 숫자가 17이라 그 떨어진 작품을 다시 걸지 않았다. 현재 17점이 걸려 있다.


▲ 어머니가 취미로 만든 자수 그림 작품 


15분 동안만 화장장 CCTV 화면으로 작별
가톨릭 신자가 약 90%인 폴란드는 매장이 일반적이지만, 화장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도 화장하기로 했다. 화장 시간 오후 1시에 맞춰 도심에서 많이 떨어진 묘지에 있는 화장장으로 갔다. 

화장장은 화장 시작 15분 전에 작별실 문을 열어주었다. 작별실에는 의자 12개와 소파가 놓여 있는 작은 방이었다. 앞에는 유리 진열장으로 막아놓았고, 그 안에는 관을 보관하는 방의 모습을 CCTV로 보여주는 텔레비젼이 걸려 있다.   

아버지 친구들이 하나 둘 자리를 메웠다. 화면에는 화장장에 들어갈 목관이 보였다. 조문객들은 적막한 침묵 속에 기도에 임했다. 있을 법한 흐느끼는 울음 소리는 전혀 없었다. 15분 후 목관이 화로로 옮겨지자 화장장 관리인이 작별실 문을 닫아야 함으로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유골함은 다음날 받기로 했다.   


▲ 화장장 작별실

▲ 작별실에서 나와 상주에게 위로하는 조문객ㄷ들

▲ 바르샤바 피아세츠노 화장장 정면 모습

▲ 화장장 바로 뒤에 위치한 납골당

▲ 주검이 연기로 변해 하늘을 닿고 있다 


평소에 잘 보살피고, 간소하게 보내야지
화장장 밖에서 조문객들은 줄을 서서 상주인 라덱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어 삼삼오오 모여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화환을 가져온 사람은 몇이 되지 않았다. 보통 묘지에 안치식을 할 때 화환을 가져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라덱에게 물었다. 
"마지막 작별인데 돌아가신 분의 얼굴이라도 보면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어머니를 보낸 지 1년밖에 안 되는데 또 다시 아버지를 보내게 되었다. 삼촌이 이번에는 그냥 이렇게 보내자고 해서 동의했다. 평소에는 모시기를 게을리하다가 돌아가신 후 성대하게 미사를 지내고, 꽃으로 무덤을 장식해 효자임네 자랑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나? 평소에 잘 보살피고 간소하게 보내는 것이지. 조만간 일가 친척이 주말에 모여 유골함 안치식을 가질 것이다."

▲ 장자(莊子)를 떠오르게 한 밤의 술상 


이날 저녁부터 라덱과 함께 돌아가신 분을 위해 쿠바 기타 음악을 들으면서 보드카 한 잔 한 잔 건배를 했다. 아내가 죽자 곡(哭) 대신 노래했던 장자가 떠오르는 밤이었다. 하지만 간간이 눈물을 훔치는 라덱을 보니 역시 죽음은 남은 자에게 슬픔이로다...
Posted by 초유스
생활얘기2008. 5. 9. 06:57

지난 5월 7일 오전 휴대전화기로 쪽지가 들어왔다. 내용인즉 빌뉴스 에스페란토 동아리 회원의 아버지가 돌아가 함께 조문을 가자는 것이었다. 평소 우리 부부와 잘 아는 사람이라 같이 가려고 했으나, 아내는 학교 일 때문에 혼자 가게 되었다. 저녁 6시 시신이 안치된 성당 앞에서 회원들이 하나 둘 모여 여섯 명이 되었다.

조화는 한 친구가 퇴근하는 길에 사왔다. 국화로 장식된 꽃바구니를 30리타스(약 13500원)에 샀고, 각자 5리타스를 내어 값을 치렀다. "한국 같으면 내가 살께~"라고 할 법 하지만,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대개 참가 인원수로 공동 부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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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투아니아의 망자가 부활한 듯한 꽃밭묘지

일반적으로 조문객들은 각자 꽃이나 화관을 가져온다. 하지만 화관 대신 조의금을 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친구들이 말한다. 이날 온 친구들은 공동 꽃바구니 외에 각자 성의껏 조의금을 냈다. 모두 준비한 봉투가 아니라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한 친구가 그 돈을 모아서 봉투 하나에 다 넣었다.

한국에선 각자 하얀 봉투 앞면엔 부의(賻儀)라고 적고, 봉투 뒷면엔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이렇게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은 다 같이 한 봉투에 넣어 선물한다고 한다. 누가 얼마를 내었는지 상주는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상주가 이에 상응하게 보답할 수가 없게 되어서 좀 아쉽지만, 내가 낸 부의금 액수 때문에 쑥스러워하거나 상주의 나중 대응에 섭섭해 할 필요가 없다.

이날 이름 없이 다 함께 모은 조의금 봉투에서 상 없는 부조의 미를 읽을 수 있었다.

한편 조문객을 위한 접대는 없었다. 한 시간 동안 조문하는 동안 눈물을 훔치는 사람은 있어도, 소리 내어 곡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한 가운데 사망자를 추모하고 안식을 기원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Posted by 초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