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라트비아 남부 지방에는 관광명소가 하나 있다. 바로 룬달레 궁전(Rundales pils)이다.
이 궁전은 쿠를란트 공국 에른스트 요한 비론 (Ernst Johan von Biron) 공작을 위해 이탈리아 출신 바로코 건축의 거장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어 라스트렐리(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30년대-1760년대에 지은 여름 궁전이다. 프랑스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해서 지었다.
이 궁전은 세워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화재나 전쟁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궁전 내부에서는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고, 정원에는 수천 그루의 장미가 자라고 있다.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즐겨찾는 라트비아 최고 관광지 중 하나이다.
궁전 내부 관람을 마친 후 정원 관람표를 따로 혹은 함께 구입한 사람은 정원으로 들어간다. 입구에 있는 전동차를 타고 정원 곳곳을 둘러볼 것을 적극 추천한다. 전동차 승차권은 3유로이다. 이 전동차 앞 유리에 붙여져 있는 여러 나라 국기가 눈에 들어온다.
라트비아
영국
러시아
리투아니아
대한민국
이 국기들은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언어를 표시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자국과 인근 나라 러시아와 리투아니아를 제외하면 영어와 한국어만 남는다. 여기에서도 한국의 세계적 위상을 확연히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2월 중순까지만 해도 지리적으로 북유럽에 속하는 리투아니아에는 혹한이 거의 없었다. 평창 올림픽의 추위 소식은 그야말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했다. 그런데 2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밤 기온이 영하 20도 내외로 떨어졌다. 혹한의 연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주초부터 날씨가 조금씩 포근해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기온이 영하인지라 쌓인 눈은 녹지 않고 있다. 최근 여러 날 또 다시 눈이 내렸다. 아래 영상은 눈을 밟으면서 강의하러 빌뉴스대학교로 가는 모습이다.
리투아니아 빌뉴스는 1323년 세워진 도시로 발트 3국 중 가장 늦게 세워진 수도이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는 1201년, 에스토니아 탈린은 1219년 세워졌다. 하지만 구시가지 규모면에 있어서 빌뉴스는 북유럽 중세 도시 중에서 제일 큰 도시 중 하나이다. 구시가지 면적이 4평방헥타르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코, 로코코, 신고전주의 등 다양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는 성당들이 곳곳에 우뚝 솟아 있다. 이 구시가지를 한눈에 잘 볼 수 있는 것이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대성당 뒤에 있는 게디미나스 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빌냐(Vilna) 강 건너편에 있는 크레이바시스(Kreivasis) 산 정상이다. 산 높이는 해발 164미터다.
이 정상에는 3십자가상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리투아니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인 14세기 이곳에서 프란치스코회 수사 7명이 참수형을 당했다.
17세기 초 이곳에 3십자가 목조각상이 세워졌다. 여러 차례 교체되어 오던 목조각상은 1916년 안타나스 비불스키스 조각가의 작품인 콘크리트 조각상로 대체되었다. 1950년 소련시대에 철거되었다가 1989년 복원되었다. 최근 3월 1일 이 정상을 올라가니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위 십자가상을 바로 지나면 아래 동영상에서 보듯이 70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빌뉴스 구시가지가 한눈에 확 들어온다.
십자가상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오른쪽에 나무가 보인다. 얼핏 보기에 별스럽지 않지만 좀 더 신경써서 보면 연리목이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연리목) 내려갈 때 보았네"라는 어느 시인의 싯구가 떠오른다.
리투아니아를 비롯해 발트 3국에 아주 흔한 소나무와 자작나무의 연리목이다.
소나무가 팔을 벌려 자작나무를 꼭 꺼안고 하늘로 자라고 있는 듯하다.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우리 나무도 이렇게 사이좋게 자라는데 너희 사람들도 사이좋게 살아라는 조용한 외침을 듣는 듯했다.
호주 3주 가족여행을 하는 동안 주로 시드니에 머물면서 근교를 둘러보았다. 2박 3일 동안 기네스 세계 기록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하얀 모래를 자랑하는 하이암스 비치가 있는 저비스 만을 둘러보기로 했다. 애어비앤비(Airbnb)를 통해 나우라( Nowra)에 숙소를 잡았다.
2층 단독주택이었다. 2층은 주인이 사용하고 1층이 여행객 숙소였다. 넓은 거실 공간 끝에 2인용 침대 하나와 1인용 침대 2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음식을 해먹을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담장이었다. 옆집과 경계를 짓는 담장을 계단식 채소밭으로 만들어놓았다.
옥수수, 호박, 가지, 토마토, 상추, 붉은 사탕무우, 순무, 딸기, 고추 등
바로 옆집은 막대기 울타리인데 이 집은 낮은 계단식 담장에 채소와 화초를 가꾸고 있었다. 텃밭이나 주말농장을 따로 가질 필요 없이 이렇게 담장을 채소밭으로 활용하다니... 한번 따라해볼만한 좋은 생각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발트 3국에서 가깝다. 에스토니아 국경 도시 나르바에서 동쪽으로 150km 떨어져 있다. 여러 차례 갈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마침내 지난 9월 중순 3박 4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방문지는 베드로와 바울 요새이다.
스웨덴 해군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표트르 1세가 1703년에 짓기 시작했다.
요새가 있는 섬은 토끼섬(이곳에 토끼들이 많이 살았다고 함)으로 불린다. 재미난 토끼 조각상들이 여러 군데 세워져 있다.
요새 가운데에 있는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이 있다. 표트르 1세의 뜻에 따라 20년에 걸쳐 지어졌다. 첨탑은 123 m로 상트페테르부크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이날 다섯 군데(베드로와 바울 대성당, 사령관 관사 -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박물관, 네바 외벽 건물 - 요새 역사 전시관, 트루베츠코이 감옥, 이오아노브스키 보루 - 우주선 박물관)를 입장할 수 있는 표를 600루블에 구입했다.
대성당 내부는 밝은 녹색 계통의 천장, 하얀색 대리석 묘, 황금색 장식물로 인해 음산한 분위기의 일반적인 묘지와는 전혀 달랐다.
대성당 안에는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에서 니콜라이 2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로마노프 왕가의 역대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다만 표트르 2세는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 그리고 이반 6세는 쉴리셀부르크 요새에 묻혀 있다.
1725년 표트르 1세가 죽은 후 그의 관은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수도원에 안치되었다가 1731년 이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이곳에는 무덤이 총 41기가 있다. 1865년 알렉산드르 2세 부부를 제외한 모든 무덤은 금박을 입힌 청동 십자가를 가진 하얀 대리석 석관으로 교체되었다. 황제와 황후의 석관은 쌍두 독수리 네 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아래는 무덤 배치도와 설명서이다.
1703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긴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초상화
로마노프 왕가의 가계도 (1613-1917)
아래는 대성당 안에 안치된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다.
먼저 표트르 1세의 무덤. 석관 위에는 십자가외 여러 기념 훈장이 붙여져 있다.
표트르 1세의 부인이자 여제인 예카테리나 1세의 무덤. 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평민 출신이다.
두 번째 줄 왼쪽부터 예카테리나 2세, 표트르 3세,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무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 안나 대공작 부인의 무덤
표트르 1세의 딸 옐리자베타 1세의 무덤
나폴레옹을 이긴 알렉산드르 1세의 무덤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 부부의 무덤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한 알렉산드르 2세 부부의 무덤. 황제의 무덤은 회녹색 알타이 벽옥으로 그리고 황후의 무덤은 분홍색 우랄 장미휘석(로도나이트)으로 장인들이 17년에 걸쳐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3세의 무덤
알렉산드르 3세의 부인 마리아는 1928년 텐마크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유언대로 남편 알렉산드르 3세 옆에 2006년 묻히게 되었다.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총살당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 유해는 1998년 대성당 안에 있는 성 예카테리나 소성당에 안치되었다.
아래는 이날 방문한 대성당 내부와 무덤을 담은 동영상이다.
대성당이 황제들의 무덤으로 점점 채워져 공간이 부족하자 1896년에서 1908년까지 그 측면에 대공작묘 소성당이 추가로 지어졌다.
이어서 나머지 네 군데 입장지를 다 둘러보았다. 막심 고리키와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가 갇혀있던 감옥도 가보았다. 12시에 입장해서 16시 30분에 이 섬에서 나왔다. 지도상 이날 이동거리는 8.5 km로 나오지만 휴대전화기 만보기는 20km를 나타냈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걷기를 좋아한다. 이날도 이렇게 걷고 나니 몸은 정말 피로했지만 새로운 곳에 여행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그 피로함을 쉽게 잊게 해주었다.
라트비아 룬달레 궁전에서 관광 안내을 할 때 사라진 쿠를란트 공국과 로마노프 역대 황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말로만 이야기하던 황제들의 무덤을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되니 다음부터는 보다 더 생생하게 여행객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베드로와 바울 요새와 대성당 방문은 이번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의 백미였다.
타르투(Tartu)는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다. 10월 초순과 중순에 다녀왔다. 가을에 찾은 타르투 도시를 사진으로 소개한다.
내셔날지오그래픽 로고 안으로 타르투 시청에 쏙 들어와 있다.
가을비가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자연 수분을 얻은 꽃은 더 버틸 수 있겠다.
한 살 반 아들과 30대 중반 아버지
어머니와 딸 조각상 앞을 방금 어머니와 딸이 지나갔다.
"이 달콤한 입맞춤의 순간이 영원하라"고 바라니 정말 이 연인 한 쌍은 조각상이 되어버렸다.
세계 최초로 경선을 정확하게 측정한 프리드리히 빌헬렘 폰 스트루베 기념탑과 그가 일한 천문대
날만 맑으면 저 놀이터에 아이들이 노란 낙엽을 가지고 놀텐데...
그 옛날 제사를 지냈던 돌제단
배양학의 선구자 카를 에른스트 폰 바에르
에스토니아 민족 문학의 선구자이자 에스토니아 현대 시학의 창시자로 평가 받는 크리스탼 약 페데르손 (1801-1822). 그가 태어난 3월 14일은 "에스토니아어의 날"이다.
타르투 대성당으로 16세기 말엽 리보니아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악마의 다리는 1613-1913 즉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기념 다리다. 이 다리를 건설할 때 감독을 맡았던 사람의 성이 Manteuffel(뜻이 사람-악마)인데도 다리 이름이 유래되었다.
아래는 천사의 다리다. 1816년 완공되었다. 1913년 보수할 때 타르투 대학교 초대 총장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폰 파로트(Georg Friedrich von Parrot)의 기념 메달을 붙였다. 영국식 정원에 위치한 것에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에스토니아어로 영국식은 잉글리세(inglise)이고, 천사는 잉겔(ingel)이다. 두 단어가 비슷하다. 한편 머리가 곱슬하고 얼굴이 천사처럼 생긴 파로트 총장의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라트비아의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리어지는 룬달레 궁전은 국내외의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8세기에 쿠를랜드 에른스트 요한 비론 공작이 세운 여름궁전이다. 일전에 찾은 룬달레 궁전에도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 사진에 담아보았다.
나무에 아직 매달려 있는 밝은 노란색 단풍과 땅에 떨어진 짙은 노란색 낙옆 사이로 옅은 노란색 룬달레 궁전가 보인다.
제철은 지났지만 연분홍 장미가 피어올라 아직도 자신의 건재함을 뽐내고 있는 듯하다.
멀지 않은 날에 하얀 눈이 저 궁전과 정원을 장식할 것이다. 그때 다시 한 번 이곳에 와보고 싶다.
지난 여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에스페란토대회에 참가하고자 우리 가족 세 명과 리투아니아 친구들이 3간 한국을 방문했다. 8월 초순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이어지는 여러 일정으로 1000장이 넘는 사진 정리와 가족 한국방문기를 쓰지를 못했다. 이제서야 사진 정리를 마쳤다. 사진을 본 딸아이 요가일래가 페이스북으로 직접 쓴 글을 보내왔다.